1980년 5월 21일 북한군이 시민군 향하여 발포하다
 

See how the rioters of the Kwangju Uprising created all kinds of false rumors. Are there anything in pro-democratic when these rioters cruelly killed policemen and soldiers by the cars and tanks they stole? This way they killed five policemen including one soldier on May 20, 1980. And these rioters set the broadcasting companies for reporting the objective facts. Is there anything pro-democratic in this barbarian violence?

아래 동영상에서 1988년 8월 4일 목요일 밤 강성구 아나운서가 MBC 뉴스데스크를 시작하려던 참에 갑자기 어느 청년이 뛰어들어 자기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장면을 본다. 무엇이 사실이었는가? 김대중의 도청공화국 시절도 아니었던 1988년에 MBC가 이 청년 귓속에 도청장치를 넣었을리 있는가?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기에 이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여겨져 체포되지 않았다.



광주에서 민중봉기를 일으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북한군 특수부대는 공수부대가 사람들을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방법으로 유혈폭동을 선동하였다. 남한 운동권으로 가장하고 공작 아지트를 둔 북한군 특수부대 1개조가 광주로 온 날은 5월 19일이었다고 탈북군인들은 증언한다. 그때 광주에 있던 김대중의 사조직들은 어떻게 움직였었는지 아래의 남한 자료들을 살펴보자.



위 동영상 처음에 80년 5월 20일이란 날자가 찍혀 있으나, 그것은 동영상 시작후 10초후부터의 장면이다. 이 한국어 동영상에는 날자 표시에 오류가 있다. 첫 장면은 5월 20일이 아니라, 5월 19일 시위장면이다. 여기 또 한 명의 정신병자가 있다. 권색 양복을 걸치고, 앞머리 숱이 적은 중년 남자가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고" 이 소리를 고장난 레코드판 모양 또 외치고 외치며 시위를 선동하는 남자가 있다. 김대중의 사조직 간부인 이 사람은 5월 18일 오전 8시부터 이 유언비어를 외치기 시작하여 5월 19일에도 계속 이렇게 외쳤다.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 -- 이 말은 유언비어이다. 이 말이 객관적인 사실이 되려면 최소한 누가 어디서 누구에게 한 말인지 제시되어야 하며, 그리고 어떻게 들었는지가 제시되어야 한다. 누가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습니다"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 등의 허무맹랑한 말을 할 때 지성인은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인지 확인하려 한다. 만약 그런 허무맹랄한 말들을 맹신하여 방송국에 불을 지르며 폭동을 일으킨다면 폭도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자, 두 사람 다 뉴스 카메라에 자기 얼굴을 내밀면서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습니다"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 등의 말을 했다. 그런데,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정신병자로 간주된 이유는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는 말을 계속 반복한 이 사람 역시 정신병자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정신병자가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습니다"고 주장하여 누명을 쓴 사람은 없는데, 다른 한 정신병자가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고 주장하여 누명을 쓴 사람이 있다. 이 유언비어는 그날 오후에는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싹쓸이하러 왔다" 유언비어로 뻥튀기되더니, 그 다음날에는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유언비어로 뻥튀기기 되었다. 어언 30년이 지난 작금 광주사태는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인데, 여태껏 그런 유언비어 제조기들에 의해 역사논리마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의 본적지는 전남 화순이다. 전두환의 할아버지 대에 전남 화순에서 경남 합천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이주했다. 전두환의 아버지 전상환 선생이 만주에 독립운동하러 떠난 것이 화근이 됐다. 그리고 전두환의 모친 역시 본관이 전라도 광주이다. 전두환 정부 시절 국무총리 2명이 모두 전라도 출신이었고, 전두환을 평생 어른으로 받드는 장세동 역시 전라도 사람이다. 보안사령관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도 군대 행정상 불가능하거니와, 부계와 모계 모두 전라도 사람인 전두환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먼저 5월 18~19일에 김대중의 사조직 중 한 정신병자가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20일에는 조선대의 정신병자에 의해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이라는 제목의 유언비어 삐라가 제작되어 전국에 뿌려진다. 자, 조선대 내의 남민전 잔존세력, 곧 민투위가 그런 유언비어 삐라를 제작하였다. 이들 좌익 운동권이 지성인인지 정신병자인지는 그들이 그 유언비어 삐라 내용이 객관적인 사실인지를 입증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가름날 것이다.

  그런데, 5월 20일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이라는 유언비어 삐라가 등장하기 전에 5월 18일 오후 1시 반부터 "전남대 학생화장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그날 김대중의 사조직은 박관현을 여수로 보낸 다음, 군경이 광주에서 그를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시위 선동에 이용한다. 광주사태는 이렇게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런 유언비어가 떠돌기 전에, 즉 5월 18일 이전에 이번 거사가 성공하면 공을 세운 이들에게 군수 자리 하나씩 나누어준다는 말이 전라도에 쫙 퍼져있었다. 이런 말을 뒷받침하는 사실이 김대중이 5월 17일 밤에 연행되기 전에 이미 예비내갹명단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5월 19일까지 하야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던 김대중은 5월 22일 전민봉기를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스스로 군주가 되어 그날 내각을 임명하려 하였다. 신민당 경선에서 패배하여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었던 김대중은 내란을 일으켜 스스로 군주가 되려 하였었다. 이런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김영삼은 김대중을 신민당에 가입시키고, 재야세력 표를 자기에게 모아 5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려 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정치 단수가 한 수 위였다. 김대중은 신민당에 가입하는척 하면서 김영삼을 이용하여 5월 20일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를 통과시키려 하였다. 본래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령을 국회가 해제할 수 없는 것인데, 아직 소속 정당이 없었던 김대중은 김영삼을 그런 일에 이용하려 하였다. 그런데, 김대중에게 정치자금을 보내주고 있던 김일성은 한 수 더 높았다. 김일성은 김대중이 김영삼을 이용하여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를 통과시키는 즉시 남침하려 하였다.

광주사태니 광주민주화운동이니 하는 명칭은 마치 광주사태가 광주 한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같은 착각을 국민에게 준다. 그러나, 그때 복면 쓴 학생혁명군으로 위장하고 학생 시위대와 합세한 수 백 명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전라도 각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주, 영암, 해남 등 전라도 각 지역에서 이번 거사가 성공하면 감투를 하나씩 쓰게 된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아래 사진은 김대중의 사조직이 복면 쓴 북한군의 지원을 받아 5월 21일 해남경찰서로부터 무기를 탈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해남의 김유곤은 거사가 성공하면 해남우체국장 시켜주겠다는 제의를 이미 김대중측으로부터 받고 있었으니 어떻게 이것이 민주화운동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영암에서도 김봉수 등 김대중의 사조직이 복면을 쓰고 폭동을 주동하였다. 광주사태 때 등장한 격렬한 구호의 여러 현수막들도 김대중의 사조직들이 보급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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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유언비어는 시민군 사망자 숫자에 대한 유언비어였다. 5월 20일 오후 6시 뉴스시간 현재시각으로 시민 사망자 수 2 명, 군경 사망자 수 5 명이었다. 시민 사망자 수는 사고 날자가 18일인지 19일인지 불분명하고, 시위대 화염병에 열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김경철 군과 조폭에게 맞은 것으로 추정되는 김안부 씨 두 명뿐이었다. 김경철군의 사인은 열상이니 시위대 화염병에 의한 열상이었을 것이요, 5월 20일 새벽 광주시 서구 서2동 전남양조장 공터에서 발견된 김안부씨의 시체는 사실 광주사태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고로 인한 사망이었다.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는 요즘에도 조폭에 의한 폭행사고가 그치지 않는데 광주경찰이 모두 시위진압에 동원되었던 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한 사망이다. 그런데 이처럼 조폭의 폭력에 의한 사망사건일 확률이 아주 높은 사건까지 합해도 5월 20일 오후 6시 뉴스시간 현재시각으로 그날의 시민 사망자 수는 1명이요, 군경 사망자 수는 5 명이었다. 1 명의 공수부대원과 4명의 순경이 시위대 차량에 깔려 사망하였다. 그런데, 아래 동영상은 이런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였다는 이유로 폭도들이 방송국에 방화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함"이란 제목의 5월 27일자 유언비어 대자보는 방송국에 불을 지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참혹하고 잔인한 방법에 의해 400여명의 시민·학생이 사망하고 1,800여명의 부상자가 났음에도 “군경 5명 사망, 시민 1명 사망”식으로 왜곡보도하는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76.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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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뉴스가 방송되던 시각에는 분명 당일의 시민 사망자가 한 명뿐이었음에도 사실을 보도하고, 유언비어를 보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송국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 다음날부터 시민군 사망자가 생겼으나, 그것은 4.19와 같은 상황을 만들면, 즉 군경이 발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고, 최규하 대통령이 발포 책임을 지고 하야하면 전국 조직을 가지고 있는 김대중이 김영삼을 제치고 군주가 된다는 김대중의 전민봉기 논리 때문이었다. 김대중 세력은 4.19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며 몇명에게 피를 흘리라고 선동하였기 때문이다.
광주사태 주동자들 중에 적화통일세력이 있었는가? 그렇다고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말한다. 예를 들어,이정로는 이렇게 말한다: "광주지역의 민중운동권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4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빨치산세대 : 이들은 광주 운동권의 최고의 선배로 불리워졌다." 이렇듯, 좌익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빨치산을 민주인사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들은 尹寄南(윤기남 미전향 좌익수 1925년 전남 해남 출생. 46년 남로당 입당, 순천, 장흥, 보성군당 위원장. 6 25전후시기 보성유격대 사령관 역임. 체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 징역형, 출소후 70년대 초 호남지역 '통혁당'재건 공작 참가. 재차 체포되어 2년 징역형. 73년 6월 미전향으로 출옥)을 이른바 국민연합과 '남총련'에서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었다.

1985년판 북한의 광주사태 자료 광주민주국의 출현 과 상당히 일치하는 주장을 이정로가 한다. 광주민중봉기의 목적이 공산주의 혁명이었다는 그의 논리는 이러하다:

<<무장혁명군은 YWCA에서 조직된 학생혁명군과 결합하여 기동타격대 체계로 다시 편제되었다. 광주지역의 모든 무장력에 대한 통제권은 새로운 봉기지도기관인 「시민학생투쟁위원회]에 장악되었다. 그리고 광주지역의 치안과 행정, 일체의 대외기관과의 교섭에 대한 전권도 5월 26일부터는 새롭게 구성된 [시민학생투쟁위원회]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각 부서는 조직되자마자 정열적으로 자신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명백히 해방된 광주의 최고권력기관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획기적 의의는 민족분단이 고착된 이채로 남한사회에서 최초로 임시혁명권력이 창출되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유일한 '봉기의 지도기관'이자, 광주 지역의 '임시혁명권력'이었다. 민중 무장의 모든 역량은 이 기관에 총집결되었으며, 그들은 내무, 외무, 치안, 군대 등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을 혁명권력으로 보지 않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러시아에서는 1905년 혁명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자발적 투쟁의 성과로서 [소비에트]라는 혁명적 권력을 탄생시켰다. 남한에서 진행된 1980년 5월의 광주무장봉기는 시민학생투쟁위원회라는 또 다른 임시혁명권력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광주의 민중은 '비굴한 타협'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총공격'의 신명나는 한판을 벌였다. 그것은 '실패한 무장봉기'였다. 만약 광주지역의 승리가 전남 전체지역의 승리로 그리고 나아가 전국적 승리로 되었다면 위대한 민족민주혁명의 성취로 이어졌을 것이다.

"광주무장봉기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고 반제투쟁의 씨앗을 뿌렸다." 이것은 가장 자주 언급되어온 광주민중봉기의 교훈 중 하나이다. 이러한 지적은 분명히 옳은 것이다. 80년 당시의 민중운동권은 '미국은 원칙적으로는 신제국주의의 포상이며 끊임없이 우리의 민족통일을 저해하는 당사국이지만 현단계에서는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미국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압박에 대항할 자주권 옹호의 투쟁도 필요하다. 그리고 민족통일을 위한 투쟁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 여러 투쟁의 과제를 반동권력으로 타도하는 '혁명적 투쟁'과 연결시켜야 한다. 화해할 수 없는 반동권력과의 투쟁만이....>>

이정로는 또 5월 20일에 이미 무기탈취가 시작되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이들은 5월 20일자에 발간된 투사회보 제1호에서 "무기제작, 무기고 탈취, 송곳, 칼 등으로의 개인적 테러를 가하는 방법" 등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이들 그룹의 주도하에 아세아자동차의 차량접수와 무기탈취 등의 무장 행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
초기에는 송곳이나 칼 등의 개인적 테러의 도구들이 주요 관심사였지만 점차 화염병과 차량, 장갑차 등이 등장하고 다이나마이트와 소총에 이어 기관총인 접수되어 활용되기에 이른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831&page=15 )

그런데, 노동자들을 제외한 상당수의 무장시민군은 친북좌익 이념으로 세뇌된 청소년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윤광장, 박행삼, 박석무 등의 좌익교사들이 학생들을 좌익 이념으로 의식화시키고 있었던 대동고 학생들 및 졸업생들이었다. 훗날 보상금 2억원 수령후 월북한 적화통일론자 윤기권도 광주사태 때 북한방송을 들었었다. 당시 광주시민들이 북한방송을 듣고 선동되었음을 윤기권과 같은 대동고 학생이었던 김지호는 이렇게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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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은 부모님의 만류가 심하여 동운동 집에서 보냈다. 오전 11시쯤에 상무대 쪽에서 온 1개 소대의 군인들이 운암아파트 뒤에 있는 운암봉 기슭을 거쳐 불공부락 쪽으로가는 것을 보았다. 고속도로를 차단하러 가는 병력인 듯싶었다. 그 뒤 상황은 북한방송을 통해서 알았다. 남한방송은 맨날 헛소리만 하고 있었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북한방송을 듣기 시작했다....지금 5·18을 생각하면 시위 도중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에 줄곧 불려졌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노래가 함성처럼 들려온다. 5·18의 민주화 이념이 통일로 승화되어 결실맺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렇듯 5.18 주동세력은 적화통일세력이었다. 1982년에 출판된 북한의 5.18 도서 역시 "몸과 대오가 그대로 육탄이 되고 불덩이가 되어 원쑤들과 결사전을 벌리던 그 나날에 그들이 심장으로부터 부른 노래는 통일의 노래였다"고 기록한다 (http://cafe.daum.net/issue21/3Fdk/4676 ).

2007년도 저질영화 "화려한 휴가"는 5.18사기꾼들이 시체장사로 돈 버는 영화였다. 그리고 그 시체 장사의 기원은 아래의 사진이다. 5.18측에서 이 사진을 가지고 앞으로 또 몇십년 동안 시체 장사할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이 두 구의 시신은 5월 21일 새벽 북한군이 폭동선동용으로 죽인 시체였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두 구의 시체는 시민군 점령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가해자의 범위가 시민군으로 좁혀진다. 그런데, 간첩단이 데리고 다니던 전옥주와 조총련 조직이 데리고 다니던 힌츠페터가 동시에 아침 6시에 그 현장에 나타난다. 이런 일이 우연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 광주는 넓으며, 금남로 또한 넓다. 푸른 눈의 목격자는 며칠 동안 금남로 일대를 돌아다녔어도 공수부대원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수만 명 단위의 전경이 출동해도 대부분의 서울시민은 뉴스로만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수백 명의 공수부대원 중 한명이라도 힌츠페터가 보기에는 금남로 일대는 너무도 넓었다. 그런데, 불순세력의 시체장사를 위해 가장 전략적인 시각에 전옥주와 힌츠페터가 동시에 나타난다.

전옥주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첫번째 인물은 시민군측 김영택 기자이다. 마산에서 광주로 5월 19일에 온 여자가 하루 만에 광주시민 대표로 광주시장과 회담하고, 이틀만에 광주시민 대표로 전남 도지사와 회담했다. 어떻게 마산시민이 광주 온지 하루만에 광주시민 대표가 될 수 있는가? 그녀는 하루아침에 광주의 여왕벌이 되어 수십 만 명의 광주 시위대를 이리가라 저리가라 호령하였다. 사실 김대중 조직이 저 위의 동영상에서 보이는 정신병자를 동원해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때 전옥주라는 프로급 사기꾼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세상에 어느 누나가 자기 남동생이 죽었다고 거짓말하는가? 전옥주는 그런 거짓말을 하였으며, 수십 만의 광주시민이 그런 거짓말에 홀렸다. 그리고 "세무서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다"는 거짓 방송을 하여 시민들이 세무소에 불지르게 하였다. 이런 프로급 사기꾼을 광주시민들은 영웅으로 받들었으나, 김영택 기자는 그의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의 취재수첩/「광주사태」 그날의 5가지 의문점. 김영택(신동아, 1987."에서 첫번째 의문점으로 꼽는다.

김영택 기자는 전옥주(본명 전춘심·당시 32세)만 보았지만 실제로는 또 한 명의 여왕 차명숙(본명 김범해·당시 23세)이 있었다. 그리고 차명숙의 거짓말 솜씨는 전옥주의 것을 뺨쳤다. 국민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 2년 중퇴인 차명숙이 전남대 영문과 2년생 행세를 했다. 그렇다면 같이 홍보활동을 하던 전남대생들이 그녀가 가짜 학생인 줄 몰랐다는 말인가? 실은 차명숙이 거느리던 운동권 학생들 역시 가짜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김대중의 사조직 중 거물이었으며, 훗날 국회의원이 될 국창근씨 집에서 연일연야 주야로 시위를 주동하고 있었으며, 갑자기 광주의 두 여왕벌처럼 등장한 차명숙과 전옥주가 그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홍보방송까지 기획하여 전 광주시민이 차명숙과 전옥주의 말에 따라 움직이게 한 그들이 초등학교 2학년 중퇴 차명숙을 전남대 영문학과 2학년생으로 등장시켰다면, 폭동 선동의 선봉에 있었던 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실은 가짜 학생들이었을 것인가!



미혼 여성 전옥주가 있지도 않은 자녀 시체 장사를 했었음을 그녀는 이렇게 증언한다: <나의 구호도『우리 모두 죽여라』『죽은 내 자식 살려내라』는 격렬한 내용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시위가 격앙되고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내 입에서는『세무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든가 하는 식의 다소 과장된 내용도 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다. 시위대에 끼인 학생들로부터 전달받은 쪽지인지 항쟁지도부로부터 접수받은 메모인지 직접 작성한 내용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여기서 시위대에 끼인 학생들이란 북한군으로 구성된 간첩조직을 말한다. 가짜 학생 차명숙 역시 아직 학생들 중 아무도 죽은 이가 없었던 때에 학생들이 여러 명 죽었다고 거짓말하며 폭동 선동 방송을 하였다. 그때 광주로 침투하던 북한군들은 연고생 혹은 학생들이란 명칭을 내세우며 침투했었는데, 차명숙이 이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는 일도 했었다. 외부에서 무장단체가 침투하고 있었으며, 김대중의 사조직들이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북한군이 침투하였을 때 숙소로 안내해 주는 이들이 있었다는 탈북군인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사실이다.
자기 동생이 죽었다느니 세무서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다느니의 거짓말을 울면서 하여 뭇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프로급 선동가 전옥주에게 5월 21일 새벽에 시체 두 구가 생겼으니 그녀의 선동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전옥주는 그때부터 이렇게 방송하였다.『보십시오. 우리의 형제가 이렇게 죽었읍니다. 지금까지 계엄군은 우리 형제 자매의 시체를 탈취해 가고 단 한사람도 죽지 않았다고 보도하지만 여러분, 똑똑히 보십시오. 여기 우리 형제가 죽어 있읍니다』 5.18측 증인이 된 당시 전경 곽형렬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증언한다: <트럭 안에서 밤을 지새우는데 새벽까지 전옥주(그때는 이름을 몰랐음) 씨의 가두방송이 가슴을 치렁치렁 울렸다."광주 시민들이여! 우리의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우리 모두 힘을 합하여 공수들을 몰아냅시다." >

그녀는 그때부터 몇시간 동안 광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단숨에 시민 30 만명을 금남로 일대로 동원한 후 도청 앞 분수대 위에 그 시체를 올려놓고 계속 시위를 선동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공수부대원들도 전경들도 그 두 구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시위대 차량에 치인 네 구의 순경 시신만을 보았을 뿐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채수봉님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이름 : 채수봉 [SUBONG1669] 조회: 28, 줄수: 4
영화 "화려한 휴가'를 고발하겠다.
 -5.18 당시 계엄군으로 참가했던 초급장교로서 비무장한 시민에게 집단 발포로 연출한 것은 사실 왜곡이며 군 명예를 훼손했기에 법적 도움을 준단면 실명으로 고발하겠다.
 -1980 년 5월 21일 최초 발포(듣기로는 그 전에 계엄군 장갑차가 시동이 꺼지자 시위대가 돌로 유리를 깰려하자 공포)시에 희생자는 장갑 차에 깔린 공수부대원 이었다.시민 시체는 한 구도 보지 못했으며 당일 아침 도청 바로 앞에 군 모포에 덮인 4~5구의 전경 시신 만 보았다.)
 -계엄군(11공수)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포가 나가고 시민과 군은 철저히 분리되었으며 일방적으로 무장한 시민군에게 쫒겨 다녔다.
 
  2007/09/07(10:15)

 (http://mbbs.imbc.com/cwb/cwb-bin/CrazyWWWBoard.asp?mode=read&num=89012&db=2005_pd3&page=1&backdepth=1 )

당시 광주시민으로서 전경으로 근무했으며, 훗날 5.18측 증인이 된 곽형렬 역시 똑같은 증언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대 버스가 들어온 것이다. 결국앞에서 있던 전경들은 양옆으로 피해 버리고 앉아 있던 경찰들이 차에 깔려버렸다. 나는 뒤쪽에 앉아 있어서 혈장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2구의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는 밤늦은 시각까지도 상무관 앞에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3기동대 소속인 병력이 몇 명 정도 남아 있어서 그들에게,"동료들이 죽었는데 이대로 놔둘 수 있느냐 모포라도 가져다가 덮어주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318&page=48 )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왜 시민군 눈에는 시민 시신만, 군경의 눈에는 군경 시신만 보이는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실은 전옥주가 신역에서 발견한 두 구의 시체를 수레에 싣고 지프로 끌고 다니는 행위 자체가 비도의적 행위였다. 중상을 입은 사람이나 갓 사망한 사람을 보았을 때는 즉시 병원으로 후송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그 더운날 지프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다섯 시간 넘도록 시체 장사하였다. 그 후에는 그 두 구의 시체를 나주에서 무기 탈취하는데 활용하였다.

전옥주가 지프를 타고 있었다. 북한군이 21일 새벽 신역에서 시위선동용 시신 두 구를 마련해 놓자마자 전옥주가 탄 차가 신역으로 왔다. 어째서 전옥주는 시위대가 순경 4명을 차량으로 깔아죽인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방송을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조총련이 일본에서 데리고 온 힌츠페터 역시 시위대가 순경 4명을 차량으로 깔아죽인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도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전옥주와 힌츠페터가 동시에 그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는가? 전옥주는 그 시신을 리어커에 실어 자기 방송차 뒤에 연결하였으며 힌츠페터는 그 광경을 촬영하였다.

여태껏 5.18측은 시민군이 5월 21일 한시 반 이후에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했다는 거짓말로 무기탈취를 정당화하여 왔다. 그렇다면, 이미 무기 탈취조가 오전 10시경에 또 그 두 구의 시체를 끌고 나주로 가 정오에 나주에 도착하여 폭동 선동 및 무기탈취에 이용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나주에서 무기를 탈취한 후에 신북과 영암과 해남 등지의 경찰서들을 습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사실이다. 시민군이 그 두 구의 시신을 영암과 해남까지 끌고다닌 것인지, 아니면 나주에서 그 두 구의 시신을 팽겨쳤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구든 정말로 친구를 사랑한다면 친구의 시신을 이 도시 저 도시로 끌고 다니며 시체 장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선량한 광주시민은 절대로 자기 가족이나 친구 시신을 그런 식으로 다루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주로 그 두 구의 시신을 끌고간 자들이 누구였겠는가?

5월 21일 오후 1시 경의 집단발포라는 것은 시민군의 선제 발포하자 놀란 공수부대원들이 1분간 공포를 쏜 사건을 일컫는다. 여태껏 5.18측은 시민군이 오후 1시의 집단발포 이후에 무기탈취를 시작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수레에 실린 저 두 구의 시체가 이제 그들의 거짓말을 입증한다. 시민군은 오전 10시 경에 저 두 구의 시체 수레를 끌고 나주로 출발하여 12시 경에 나주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그곳에서 탈취한 무기들을 가지고 전라도 각 지역 경찰서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습격하였기 때문이다. 낮 12시 경 도청 앞에서 시위대와 계엄군의 거리가 계속 좁혀지고 있던 때에 이미 그 두 구의 시신은 나주로 운반되어 있었으므로 군경 편에서는 그 두 구의 시신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5.18측이 시민군의 최초무장시점에 대하여 허위주장을 해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화순에서의 무기 탈취 사건이다. 오후 2시경이 아니라, 오전 11시경에 이미 시민군 무기탈취조가 화순을 향하여 출발하였음을 "광주민중항쟁 총일지"는 이렇게 입증한다:

"버스와 트럭에 탄 시위대들이 오전 11시경 화순으로 향했다. 우리가 화순경찰서에 도착하자 무기고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재빨리 도망갔다. 그곳에서 카빈을 탈취하여 그곳 주민과 함께 화순군내를 돌아다니며 차량시위를 했다. 그날 밤은 화순에서 자고 22일 새벽에 광주로 와서 전남대 의대 부근에 있는 시민들에게 탈취한 무기를 나눠줬다." (구술 : 이상배, 현사연 조사)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7&page=69 )

시민군 문관도 상당히 많은 시민군 병력이 이미 오후 1시경에 화순에 도착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오후 1시쯤 광주에서 시위대가 넘어왔다는 말이있어 화순경찰서 앞에 나가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버스 2대와 군용트럭외에도 여러 종류의 차들이 15대 정도 와 있었다. 시위대는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면서 구호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광주에서 난리가 났으니 젊은 혈기 있는 사람은 모두 차에 타시오>(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 /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68&page=38 )

김대중의 내란음모 증거물은 이것이다.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시민군 5월 21일 작전상황을 보도하는 투사회보 2호이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18.html 에 그 전문이 있는 위의 투사회보에서 "21일에는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는 문장이 있다. 그런데 나주에서 차량과 무기 탈취는 위의 수레에 실린 시체 두 구를 끌고 오전 10시경에 나주를 향하여 떠난 시민군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이미 21일 오전에 상당히 많은 병력의 시민군이 전라도 전 지역에 퍼져 경찰서들을 초토화하고 있었다.

5월 21일 광주시민군이 전라도 전 지역의 경찰서와 관공서 및 심지어 때로는 군부대까지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하고 있었음을 오직 북한 당국만이 실시간 파악할 수 있었다. 무장시민군 속에 끼어있던 북한군들조차 자기 조 외의 활동은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대중의 사조직 역시 전라도 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무장봉기 상황을 실시간 파악하고 있었다. 즉, 전라도 각 지역에서의 무기와 차량 탈취, 경찰서 파괴 및 관공서 함락 현황 등을 김대중의 사조직이 실시간 보고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로 반입된 무기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우연히 광주시민군이 5월 21일 오전부터 전라도 전 지역으로 흩어져 무기를 탈취한 것이 아니라, 치밀한 사전 계획에 김대중의 사조직이 연루되어 있었음을 입증한다.

5월 21일 오전 전라도 전 지역을 향하여 출발한 시민군이 동시다발적으로 각 지역 경찰서들을 초토화하고 있던 시각에 또 하나의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었음을 시민군 이재의는 이렇게 증언한다:



"오늘밤 상무대 병력이 돌고개 부근을 향해 진입할 가능성이 많다고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또 31사단 병력이 오치를 거쳐 서방으로 공격해 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 이런 말은 악성 유언비어이다. 상무대 병력, 즉 31사단 병력은 광주향토사단 병력이다. 광주향토사단이 광주를 공격할 리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광주시민들이 국군에 적대감을 품게 하는 자들이 있었다. 또 이런 표현이 수상하지 아니한가: "지금 준비되어 있는 아군의 병력 중 LMG와 기관총 3정은 아세아극장 옥상에 1정, 그 밑 도로변 양옆에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각 1정씩 배치하십시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77&page=37 ) 북한군 외에 또 누가 국군을 적군으로 간주한다는 말인가?

북한군 침투 사실의 보다 분명한 증거는 위의 시체 두 구를 끌고 나주로 가서 정오부터 무기탈취를 하였던 광주시민군이 신북과 영암을 거쳐 해남과 완도의 경찰서 및 군부대 습격 후 73대의 대병력으로 광주로 돌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군용트럭으로 73대의 시민군 병력이면 가히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만한 병력이었다. 당시 진압봉만 든 공수부대 병력이 10 대의 트럭으로 동원된 것에 대해서 광주의 원성이 그토톡 높았다면 73대 트럭의 중무장한 시민군 병력은 가히 엄청난 병력이었다. 훗날 월북한 윤기권이 대동교 박행삼의 제자였는데, 해남으로부터 이런 시민군 대병력을 끌고 광주를 향하여 오던 박행삼은 당시 시민군 대다수는 시민군이 낸 교통사고로 죽거나 다쳤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73대의 차를 이끌고 노안을 거쳐 송정리에 도착했다. 노안과 송정리 사이에 다리가 있었는데 기중기 한 대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추락해 있었다. 차들을 멈추고 사람들과 다리 아래로 갔다. 추락한 차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즉사했고, 한 사람은 빠져나왔는데, 나머지 한 사람은 차에 끼여 있어서 도저히 우리들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차는 아세아자동차에서 빼내온 차라고 했다. 차에 낀 사람은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노안국민학교에서 줄다리기 할 때 쓰는 줄을 빌려왔다. 기중기를 묶어 위에서 트럭 세대가 끌었는데 기중기는 끄덕도 하지 않고 밧줄만 끊어져버렸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227&page=54 ).

그리고 그 다음날 5월 22일 07:50 의 상황이다.

- 폭도 3백 명 탑승한 군용차 45대 송정리역 집결, 공포 발사. (전교사 작전일지)
이 상황에 대한 5.18측 증언은 이러하다.

- 전날 시외곽으로 나갔던 차량들이 광주로 진입하려다 효천지역에 주둔한 계엄군의 사격으로 길이 막히자 나주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송정리로 이동한 것이다. (현사연 조사 종합)

자, 시민군 군용차 73대 중 3대는 무기반납을 조건으로 먼저 광주로 들어오고, 45대가 송정리역에 집결하였다. 같은 시각 전옥주는 연고생 3백 명이 송정리쪽에서 오고 있다고 방송하였다. 여기서 연고생이란 서울에서 온 연고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인 해남과 완도에서 온 무장시민군을 말한다. 그들이 광주로 들어오려 했으며, 전옥주는 광주시민군을 동원해 그들이 올 수 있도록 지원하려 하였다. 물론, 전옥주는 김대중의 사조직과 간첩이 주는 쪽지대로 방송하였을 뿐이지만, 이것은 북한세력끼리는 연락이 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해 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탈북군인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시민군 이용일의 증언이다. 이용일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시민군들이 총탄이 시민군 편에서 날라왔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이용일은 5월 21일 오후 1시 이전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라왔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언한다.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것없이 총을 들었다. 그 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바로 내 옆사람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은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 쪽으로 나뉘어 모두 흩어졌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은 아예 밟혀버렸다. 잠시 후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또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러닝셔츠만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상체를 위로 내놓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총을 한 자루 던져주었는데 그는 필요없다며 받지 않았다. 그 장갑차는 얼마쯤 앞으로 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도청 쪽에서 저격병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

그외에도 몇 대의 차가 도청을 향해서 나가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 차 뒤에는 몇몇 사람들이 낮은 포복자세로 따라갔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총을 배급받은 사람들은 총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었다. 한편 사람들은 낮게 떠다니는 헬기를 맞추겠다고 하늘을 향해서 공포를 쏘기도 했다. 나도 총을 받았다. 비록 그 이전에는 쏘아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지만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폼을 잡고 가톨릭센타 옥상을 향해서 쏘았다. 여기에는 군인들이 건물 중심부 쪽 약간 올라온 곳에 철모만 덮어놓고 왔다갔다 하면서 이곳의 동정을 저쪽에다 알려주는 듯싶었다. 하지만 내가 쏜 총은 그 반동 때문에 울려서 상체가 뒤로 젖혀졌고, 가톨릭센터 건물의 꼭대기를 빗맞고 나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총알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광주은행 새 건물의 옥상과 12층에서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민들은 저놈들도 연락병일 것이니까 다 죽여버리고 저 건물을 태워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나이 든 어른들이 이번에 지은 새 건물인데 태우지 말자며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page=10&sn1=&diu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1 )

시민군이 배식차가 못 다니게 하여 며칠째 굶다시피한 공수부대원들과 달리 5월 21일 시민군의 푸짐한 점심식사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그렇다면 "점심때가 좀 지나서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는 사실은 일반 시민군을 대상으로 한 무기지급도 이미 낮 12시 경에 시작되었음이 밝혀진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다고 증언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이용일의 증언으로 밝혀진다.

누가 금남로의 시민군을 향하여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발포하였는가? 이것이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사실임을 공감하는 5.18측 논객 이데아는 그 지형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가톨릭센터는 도청 앞에서부터 시작 금남로 1가의 끄트머리 즉, 도청 앞에서 전방으로 1Km 이내의 좀 떨어진 장소입니다.
 이곳은 사거리이고, 이 사거리 한모퉁이에 가톨릭센터가 도청을 바라보는 쪽으로 위치해 서있으며, 양쪽길이 각각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으로 갈립니다." (http://cafe.daum.net/issue21/3Fdk/4629 )

이것이 중요한 난제이다. 다수의 시민군 부상자들은 정면이 아니라, 고층건물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았다고 증언한다.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울린 총성이 있었으며, 이것이 첫번째 총성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쏘았는가? 도청 앞에서 전방으로 1km 떨어진 시민군 점령지역은 그 시간대에는 공수부대원 접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탈북군인들은 군복차림의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시민군과 계엄군 양편을 향하여 총을 쏘며 시민군과 계엄군간의 총격전을 부추겼다고 한다. 그러면, 과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계엄군 쪽을 향해서도 총을 쏘았는가? 그 사실을 위의 채수봉님이 이렇게 확증한다: "건너편 고층 건물 15층 정도에서 흰 y셔츠를 입은 사람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아 은행(중간크기 나무)잎을 스치면서 땅을 튕겼다."

이름 : 채수봉 [SUBONG1669] 조회: 226, 줄수: 7
무릎쏴가 아닌 갈겨쏴
 부언해서 설명합니다.공포가 있자, 철저히 계엄군과 시민은 분리 되었으며 중앙에 장갑차를 중심으로 바리케이트가 쳐치면서 우리 팀은 도청을 왼쪽으로 두고 정비소 담벼락에 기대어 쉬고 있으면서 본 광경은
 -시체는 한 구도 없었다.(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중간에 노인네가 길을 가로 질러 가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건너편 고층 건물 15층 정도에서 흰 y셔츠를 입은 사람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아 은행(중간크기 나무)잎을 스치면서 땅을 튕겼 다.저격수의 맞대응으로 주저앉음(공포가 나가기전 군 트럭,장갑차,예비군 소총이 탈취된 것으로 추정됨)
 -100m 왼쪽 전방에 버스 한 대가 서 있었고 버스 앞으로 몽둥이 휘두르면서  2,3명의 젊은이가 오자 장갑차에서 2발 정도 사격을 가하자 사라졌다.
 -잠시후 폐허의 거리를 따라(일부 공포) 조선대학교로 퇴각하여 밤새도록 무등산 뒤로 쫒기며 도망만 다녔다.
 -우린 시민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2007/09/05(14:17)


이로써 탈북자들의 증언대로 실제로 시민군과 계엄군 양편을 향하여 발포한 무장폭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시민군과 계엄군 양편을 향한 첫 발포는 5월 21일 12시 58분경에 있었으며, 이른바 집단발포라는 사건, 즉 시민군 진영 총소리에 놀란 공수부대가 1분간 공포를 쏜 사건은 이렇게 빚어졌던 것이다.


역사학도 2010. 2. 16


복음과 문화


세계기록유산이 될 5.18 대자보: 미 항공모함 유언비어

북한판 5.18도서가 암시하는 시민군 윤기권의 월북 이유

왜 우리는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


 

광주사태 바로 알기
질문 포인트

* 광주시민군 지도부가 미 항공모함 뮤언비어를 조작해 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 광주시민군 지도부는 미 항공모함 뮤언비어를 어떤 방법으로 유포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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