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한과의 5·18 맞짱토론



    저는 1982년에 선교 100주년 총회교육부 선교교재로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 역사’를 집필하였던 김대령 박사입니다. 그런데 명문 선교사 가문의 인요한 선교사님의5·18 묘지 참배와 5·18 헌법 수록 발언에 이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지나친 5·18 묘지 참배의 신학적 문제는 제쳐 놓더라도 명문 선교사 가문 출신 선교사님의 정치인으로서의 참배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특정 정치인들의 5·18 묘지 참배는 하나의 의식, 광주사태와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으신 분에게 광주학살 누명을 씌우기 위한 의식처럼 되어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명이 바뀌었어도 대한민국에서 현재 유일하게 보수우파 정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민의힘의 기원은 1981년 1월에 창당된 민주정의당입니다. 그런데 인요한 선교사님이 5·18 묘지에 참배하면서 “용서는 하되 잊지 말자”고 말한 것은 누군가를 정적으로 여기고 정적을 정죄하며 죄인 취급하는 말입니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님께서 누구를 죄인 취급하시는 것입니까? 민정당을 창당하신 분을 정죄하신 것이라면 민정당은 탄생하지 말았어야 할 정당이 되고, 그런 논리의 귀결은 민정당의 후신 국민의힘은 존재하지 말아야 할 정당이 됩니다. 그렇게 국민의힘의 역사적 뿌리를 통째로 부정하는 관점에서 처방전을 내놓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으로서 5·18 묘지에서 하신 발언은1980년대 국가건설의 주역들이 마치 나치가 독일과 유럽에서 유대인 대학살을 한 것과도 같은 학살을 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저는 유대인들에게 무장시민군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마치 한국판 유대인 학살이 있었던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고 그 학살 프레임으로 5·18을 성역화하는 발언에 우리는 몸서리처지는 전율마저 느낍니다.

    혼자서 조용히 하는 참배가 아니라 사진기자들을 데리고 가서 하는 참배는 정치적 흑색선전 의식입니다. 국민의힘의 뿌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1년 1월에 창당한 민정당임에도 국민의힘 혁신위원들 모두가 한국의 보수우파 정당 창시자에게 학살 누명을 씌우는 의식을 거행하였다는 것은 뭔가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더구나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인솔하는 대표단이 5.18 행불자 묘지에 참배하고 헌화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 수십 명의 북한 대표단이 비를 맞으면서까지 5·18묘지에 참배하고 헌화하던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북한 대표단에는 광주 5·18묘지에 반드시 참배하고 헌화하여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께서 김대중 정신에 대해서 말하시지만 김대중의 첫번째 비서로서 오랜 세월 김대중과 가장 가까웠던 분은 김경재 선생님이십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순천에서 졸업하셨으며,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시절에 순천 국회의원이셨던 김경재 선생이야말로 순천 토박이 중의 토박이이고, 인요한 선교사님의 순천 대선배이십니다.

    김경재 선생께서 1999년 12월 6일부터 14일까지 김대중 대통령의 밀사로서 북한 방문을 하는 기간 동안에 안내원의 안내로 혁명열사능에 방문하였는데, 혁명열사능 안에서 왼쪽으로 가보니 5·18혁명열사묘가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김경재가 안내원에게 여기 5·18이 광주 5·18이냐고 물으니 북한 상류층 엘리뜨 안내원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것입니까”라고 묻자 “물론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에이 광주는 그 사람들이 들어갈 이유가 없을텐데”라고 하자 “아! 우리가 왜 거짓말합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김경재 선생이 북한의 5·18혁명열사묘에 대해서 보고들은 것은 북한 정부기관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년감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북한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부터 광주사태 때까지 남파된 후 1980년 6월 하순까지 북한으로 복귀하지 못한 북한군들에 대해서 그 해 8월 30일에 일괄적으로 전사자로 처리하여 그 명단을 기록하고, 5·18혁명열사묘를 만들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남파된 5·18혁명열사들의 시신이 광주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북한 대표단이 광주 5·18묘지에 참배하고 헌화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5·18묘지에 안장된 자들 중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자들이 있었습니다. 목포에서도 관공서를 접수하여 해방구를 설치한 시민군 차량들이 5월 22일에 날이 어두워진 후에도 도로를 질주하며 차량 퍼레이드를 하다가 오후 8시 5분경에 목포시 상락동 한국양복총판 앞 노상에서 시민군 트럭에서 이십대 청년이 떨어져 사망하였습니다. 운전을 할 줄 모르는 난동자들이 군용트럭과 군용차량 등을 탈취하여 운전하였을 때 시민군이 트럭에서 아스팔트 도로로 떨어지며 뇌타박상을 입어 사망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목포에서 그 사고를 당한 시민군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학살이라는 단어는 어느 한쪽이 비무장집단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무려 5천 정의 총기와 30만발의 실탄으로 무장하고 있던 시민군이 비무장집단이었는가요?

    시민군은 M16소총 35정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5천 정의 총기와 29만 95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12만 발이 넘는 실탄을 쏘았습니다. 시민군이 사용한 실탄 수로 따지면 이것은 빨치산의 유격전 수준을 넘는 전쟁 규모였습니다. 게다가 총기 희생자 중 대다수는 시민군들만 소지하고 있던 칼빈총 총탄에 의한 희생자들이었습니다. 5월 21일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공수부대 사병들의 총은 실탄이 없는 빈 총이었습니다.

    행불자 묘지에 참배하신 인요한 선교사님, 5월 21일 저녁에 공수부대가 철수하였을 때는 도청 안에 시신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시민군 점령 하에서 도청 안에 여러 구의 시신의 관들이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선교사님이 아직 순천에 계시던 24일에 광주에서는 전남도청 안에서 인민재판이 행해진 사실이 미국무부의 5·18 문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카터 정부의 에드먼드 머스키 (Edmond Muskie) 국무장관은 그 사실을 5월 25일자 전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광주상황이 악화되었다. 온건파 시민위원회는 상황 통제력을 상실하고 과격파가 도청을 장악하였다. 인민재판소가 설치되고 몇 건의 사형 집행이 실시되었다. 학생 시위대는 혁명정부를 세우겠다고 말하는 정체불명의 무장난동자들로 대체되었다 (The situation in Kwangju has taken a rather grim turn. The moderate citizens committee has lost control of the situation and the radicals appear to be in charge. Peoples courts have been set up and some executions have taken place. Student demonstrators have been largely replaced by unidentified armed radicals who are talking of setting up a revolutionary government).

    다음 날인 5월26일에는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 주한 미국대사가 전날인 5월 25일(일요일)에도 광주에서 시민군들이 인민재판으로 시민들을 처형한 사건이 있었음을 다음과같이 워싱턴에 보고했습니다:

    2. 광주상황: 5월 25일 일요일에 광주사건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민간인들로 구성된 기동순찰대(vigilante group)에 대한 보고가 있으며, 며칠전 반납했던 무기를 난동자들이 도로 가져왔으며, 인민재판과 처형이 있었다. 2. SITUATION IN KWANGJU: DURING THE COURSE OF SUNDAY, MAY 25, EVENTS IN KWANGJU TOOK A SHARP TURN FOR THE WORSE. THERE WERE REPORTS OF VIGILANTE GROUPS, RECOVERY BY RADICALS OF WEAPONS TURNED IN EARLIER, AND EVEN OF PEOPLE'S COURTS AND EXECUTIONS.

    선교사님이 영어 통역으로 윤상원의 홍보팀 역할을 시작하시던 바로 그 날 5월 25일 미국과 북한은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습니다. 인민재판을 실시한 시민군에 아주 냉담한 반응을 보인 미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광주인민봉기를 지원하는 평양 군중대회를 아주 대규모로 하였습니다.

    5·18 기록물과 미국 국무부 5·18 문건에서 기동순찰대는 도청시민군을 지칭합니다. 도청시민군이란 명칭은 광주사태가 끝난지 한참 후에 사용된 명칭이고, 5월 22일부터 사용된 첫번째 명칭은 기동순찰대였는데 광주해방구에 아직 경찰이 남아있는지 살펴보고 사복경찰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체포하는 무장시민들을 기동순찰대라고 불렀습니다.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관이 오히려 무장세력의 체포대상이 되는 현상이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반란사건 이래 1980년 5월의 광주해방구에서 재현되었습니다.

김인태씨를 납치하는 시민군

    시민군 대장으로 불리는 박남선씨는 이 5월 24일자 사진에서 왼손에 M203유탄발사기를 들고 체포조를 인솔하는 자가 자기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끌려가는 분은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5월 19일 차에 실어 광주로 동원한 해남 농민 김인태씨입니다. 이분이 시민군들에게 끌려간 지 닷새 지나서 이분 아내 심복례씨는 남편 사망통지 전보를 받았습니다. 전라도 경찰이 전라도 도민의 생명을 지켜줄 수 없었던 무법천지가 광주해방구의 진상이었습니다.

    박남선 손에 들린 M203유탄발사기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인요한 선교사님이 5월 26일 오후에 윤상원의 외신기자회견을 통역해 주신지 1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윤상원이 바로 이 유탄발사기 오발사고로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윤상원은 총상이 아닌 화상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도청본관 2층의 소강당처럼 넓은 사무실이 민원실이었으며, 시민군들은 민원실을 식당겸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5월 27일 아침 6시에 도청 상황이 종료된 후 노먼 소프(Norman Thorpe) 기자가 도청으로 달려가 2층 민원실에서 윤상원의 시신을 발견하고 사인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하였습니다. 불에 검게 그을린 윤상원의 몸이 커튼처럼 보이는 담요에 덮여 있었고, 담요에 유탄 파편이 박혀 있었습니다.

    시민군이 유탄발사기를 몇 정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5월 27일 새벽에 유탄발사기를 들고 있었던 시민군 간부는 누구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유탄발사기에서 윤상원의 담요로 발사된 유탄으로 인해 윤상원이 화상을 입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윤상원이 처음 배꼽 아래 입은 찰과상은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가벼운 부상이었습니다. 열흘 동안 밤을 새다시피 바빴던 윤상원에게 5월 27일 새벽에 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은 그의 동지 김영철이었습니다. 김영철이 윤상원을 민원실 한 구석에 눕히고 그의 몸에 덮어준 것이 이불 이었는지, 담요였는지, 아니면 커튼이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김영철의 의도는 윤상원이 휴식과 안정을 취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담요를 덮어주는 순간 유탄발사기 오발사고로 담요에 불이 붙으며 윤상원에게 화상을 입혔습니다.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켰던 윤상원이 시민군 무기 중 하나였던 유탄발사기 오발사고 희생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김중식씨를 납치하는 시민군

    시민군들이 김인태씨를 체포하여 도청 안으로 끌고 간 5월 24일에 또 한 명의 30대 여인이 남편을 잃었습니다. 김중식과 부인 윤숙자는 1971년에 중매결혼하였습니다. 남편은 서울에서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였으나 고향 장흥에서 양계장 사업에 번번히 실패하였기에 부부가 형 집에 얹혀살다가 1980년 봄이 되어서야 남편이 모 학원 전무라는 변변한 직장을 갖게 되고, 모처럼 부부가 셋방에서 신접살림을 하는 행복이 찾아왔을 때 시민군들이 그 행복을 앗아갔습니다. 자주색 티 나는 상의와 옅은 쑥색 하의를 입고 궐기대회에 참석한 김중식씨는 궐기대회 장소에서 시민군들에게 붙잡혀 도청 안으로 끌려간 후 다시는 아내와 자녀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인요한과 강기정

    빨치산과 시민군의 두드러진 공통점이 무기고 습격과 후방을 교란시키는 유격전과 인민재판입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자유 민주주의가 아닌 인민민주주의를 국시로 삼는 국가를 한반도에 건국하고자 하였으며,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건국 초창기부터 줄곧 인민민주주의 진영의 공격을 받아왔으며, 인민민주주의의 특징이 인민재판입니다. 어째서 강기정 광주시장이 한국을 침략한 중공 인민군 거물 정율성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있는가요?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아님을 ‘민족민주화’라는 표어로 표현하였습니다. 인민민주주의를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광주사태를 사전 조직한 자들은 광주혁명의 목표는 사회주의혁명임을 ‘사회민주화’라는 단어로 내부자 그룹에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당시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박현채 등 빨치산 계열의 운동가들이 말하는 사회주의, 즉 북한식 사회주의였습니다.

    광주사태 당시 인요한 선교사님의 순천 지인 중에 현 더불어민주당 이학영 의원이 있었지요? 신향식의 동지 이학영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전사였는데, 남민전이 바로 인민민주주의 진영의 반국가 단체였습니다. 남민전 스스로 반군(反軍)의 정체성을 민족해방전선이란 명칭으로 표현하였으며, 광주사태는 남민전 하부조직 민투가 조직하였습니다. 김일성에게 지원 요청 편지를 쓴 남민전이 광주운동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만 아셔도 광주가 민주주의를 완성했다는 선교사님 말이 얼마나 슬픈 코미디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시민들을 납치하여 인민재판으로 처형하던 시민군들의 행동은 1948년 4월의 제주4.3사건, 1948년 10월의 여수반란사건 및 한국전쟁 당시의 빨치산의 행동과 크게 다를 바가 무엇인가요? 도대체 광주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완성하였다고 주장하시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시민군들이 무엇을 하였기에? 시민군들이 무기고를 습격하였기에? 빨치산들도 그랬습니다. 시민군들이 경찰서를 습격하였기에? 빨치산들도 그랬습니다. 시민군들이 교도소를 습격하였기에? 빨치산들도 그랬습니다. 시민군들이 공공건물에 방화하고, 관공서를 점거하고, 해방구를 설치하고, 국군을 공격하였기에? 빨치산들도 그랬습니다.

정지영씨를 납치하는 시민군

    선교사님이 국민의힘 혁신위원장 자격으로 지난 10월 30일 광주 행불자 묘역에 참배하셨는데, 전 5·18유족회 회장 정수만씨의 동생 정지영씨의 경우는 시민군들에게 납치된 분이 행불자로 신고된 경우입니다. 5월 27일에 정수만씨는 자기 동생을 행불자로 신고하였으나 5·18취재기자들이 찍은 사진기록은 그가 시민군들한테 납치당하였기 때문에 가족이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가족 증언에 따르면 정지영씨도 5월 18일에는 동명동 파출소 습격에, 19일에는 기독교방송국을 경비하는 군인들을 폭행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20일부터는 귀가하지 않고 시민군 활동을 한 것으로 가족들이 추정하는 그도 시민군들한테 체포당하는 운명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시민군들에게 납치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5월 25일 오후에 광주에 오신 선교사님은 도청에서 보신 관은 시민군들이 가해자였던 희생자들의 관이었습니다. 인민재판으로 시민들을 처형한 시민군들을 용서해주는 것은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민재판 가해자는 시민군이었음에도 그 인민재판 사건과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에게 광주학살 누명을 씌워 40여년간 괴롭힌 파렴치함은 이해가 안 됩니다.

시민을 전남도청으로 납치하는 시민군

    시민들이 시민군들에게 붙잡혀 도청 안 조사실로 끌려가는 사진들을 김현장이 본다면 어떤 느낌을 가질까요?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를 맨처음 전주에서 지어내 그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유인물을 광주로 보낸 자가 김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5월 26일에 광주에 도착하였을 때 김현장이 누군지 모르는 시민군들이 YMCA에서 그를 수상하게 여기고 체포하여 도청 조사실로 끌고가려 하였던 일화가 있었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이 5월 25일에 통역으로 시민군 활동을 하시던 날 광주에서 함께 시민군 활동을 하던 자들 중에서 이튿날 새벽에 계모와 자기 아버지와 아들을 사살한 시민군도 있었습니다. 계모에 대한 평소 불만이 시민군 총을 소지하고 있었을 때 폭발한 것입니다. 민간인들이 총을 소지하고 있으면 이런 사건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기에 그날 최규하 대통령께서 친히 광주를 방문하시어 무기 반납을 호소하셨던 것입니다.

    스스로 순천촌놈이라고 자칭하시는 인요한 선교사님께서 여순반란사건, 즉 여수·순천반란사건에 대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시민군 대표라고 하는 윤상원의 상관은 순천반란사건 당시 빨치산이었던 북한 조선로동당 당원 김세원이었습니다.

    김세원은 6·25 전쟁 때는 북한군을 도와 국군을 공격하였으며, 심지어 국군병력 수송열차까지 공격하는 유격대 대원이었으며, 1960년대에는 인혁당 이었고, 광주사태 당시에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간부로서 무장봉기를 배후에서 지휘하고 조종하였습니다.

    5월 21일 괴무장단체가 도청을 점거한 이유는 해방구를 설치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여순반란사건과 6·25전쟁 때도 빨치산은 먼저 관공서를 점거한 후에 해방구를 설치하였습니다.

     스스로 순천촌놈이라고 하시는 선교사님은 순천에 왜 5·18 유공자들이 있는지를, 어째서 5월 21일 저녁에 순천 승주군 송강면 지서 습격 사건이 있었는지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2013년 5월 18일자의 “5·18 北개입설 광주 모독 행위” 제하의 동아일보 기사에서 선교사님은 광주 시민군 대표로부터 ‘내부에서 간첩으로 추정되는 수상한 사람을 잡아 맞서고 있던 군인들에게 백기를 들고 그 사람을 넘겨주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셨으며, 그런 얘기로 지금껏 시민군은 반공 주의자들이라는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광주시민들이 간첩으로 추정한 수상한 사람이 바로 선교사님이 외신기자들에게 영어 통역을 해준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을 어찌 모르십니까? 선교사님이 광주로 온 날 5월 25일부터 목공 천순남이 총을 들고 도청시민군이 된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 날 외상 쌀을 구하려다 못 구한 그는 시민군 활동을 하면 식사가 무료로 제공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훗날 5·18 유공자가 된 천순남은 선교사님이 궐기대회에서 통역을 해 준 여자를 광주시민들이 간첩으로 여기고 연행하는 광경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 여섯 명은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음식은 못 구하고 사람들을 싣고 도청으로 왔다. 오후 5-6시 정도였는데 도청 앞에서는 시민궐기대회를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참여하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구호를 외치며 함께 했다. 그리고 남자들 서너 명이 얼굴이 둥글고 입이 쭉 내밀어진 여자를 잡아 어깨를 부추겨서 '간첩이다' 하며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 (천순남 1988)

     천순남이 말하는 얼굴이 둥글고 입이 쭉 내밀어진 여자는 이 여자로 보입니다. 이 여자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으며, 한국 사람이 안쓰는 이상한 표현, 즉 ‘광주시민동포 여러분’ 등의 표현을 쓰고 있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이 수상하게 본 여성선동가는 전옥주를 포함하여 두어명이었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이 영어 통역을 해준 여자를 간첩으로 여겨 505보안부대로 넘긴 분은 광주시청 직원 이무길입니다. 이 여자는 선교사님이 도청광장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분수대에 등단하여 마이크를 잡고 자기 아들이 총 맞고 죽었다고 오열하며 연설하였습니다. 윤상원의 최측근 후배였던 뱅모 박성현도 처음에는 그 여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연설에 선동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주사태에 대하여 처음에는 선교사님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윤상원의 후계자가 되어 학림사건 주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여자는 광주시민도 아니면서 실체가 없는 말로 자극적인 선동을 한 것으로 보아 선동조 여간첩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윤상원의 최측근 후배로서 윤상원의 홍보팀에서 활동하던 전용호 역시 훗날 광주의 언론사 기자가 된 후 여성 선동가의 정체에 대한 강한 의문을 품고 알아보다가 여성 선동가의 발언은 전혀 신뢰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은2020년 8월 2일 방송된 tvN ‘서울촌놈’에서 "광주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경호해주는 대학생이 있었는데 광주를 떠나면서 `여긴 곧 진압할 텐데 내가 군인들을 봤다. 생명이 위태로우니 떠나라`라고 말했다"며 "그 학생은 `그런 얘기하지 마라. 도청을 지키는 자들은 이미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이다`라고 말하더라. 그때 깊이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됐다"고 하셨습니다.

     “도청을 지키는 자들은 이미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이다” – 이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물론 5월 21일부터 시민군 총기오발사고 희생자들이 여러명 있었지만 도청 시민군들 중 아무도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도청을 지키는 자들은 이미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이다” – 이런 선동적인 거짓말을 한 자가 누구인가요?

     시민군 연령대만 살펴보셔도 시민군이 민주화운동하였다는 주장은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광주시민으로 구성된 시민군은 기동타격대라는 명칭으로 박남선이 5월 26일 오후에 처음으로 조직하였는데, 전체 인원이 기껏 40명에 불과하였으며, 태반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십대 청소년 들이었습니다.

     가구공으로서 시민군이었던 나일성을 비롯한 기동타격대 제6조 대원들은 대부분 십대 청소년들이었는데 5월 27일 이른 새벽에 총과 실탄을 지급받은 후 그들이 지프차에 감추어 두었던 소주를 마셨습니다. 17세 고등학생 시민군이었던 안성옥의 제2조 대원들은 도청 기동타격대 사무실에서 양담배 한 갑씩을 받아서 피었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 도청이 청소년들이 소주 마시고 양담배 피우며 거리정치하는 곳인가요?

     윤상원 등 5월 27일 새벽 도청 구간 희생자들은 무장시민군 무기 회수 임무를 띤 군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발생한 총기사고 희생자들이었습니다. 5월 27일 새벽 4시에 교회 새벽종 소리와 함께 울리기 시작한 총성은 시민군들이 쏘는 총성이었습니다.

     만약 도청 건물 안에서 군인들과 시민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면 시신이 도청 안에 있어야 할텐데 시민군 총기오발 희생자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시신들은 도청 정문 바깥 분수대 쪽 광장에 있었습니다. 어찌된 일인가요? 도청 안에서는 시민군과 군인 사이의 전투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군인들이 사람을 향해서 총을 쏘는 것을 본 시민군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시민군 조사부 부장이었다고 증언하는 신만식은 공수부대 군복 얼룩무늬와 아주 비슷한 방위병 군복을 입고 있었고, 군복을 입은 시민군 윤석루처럼 국군 장군 철모를 쓴 시민군, 이재춘처럼 공수특전단 모자를 쓴 시민군들도 있었기 때문에 5월 27일 새벽 4시경의 어둠 속에서 시민군들이 피아 식별을 못하고 서로 상대방을 군인으로 혼동하곤 했습니다.

     건달 두목 출신 신만식 등 시민군 간부들의 총은 카빈총이 아닌 M16이었습니다. 5월 27일 이른 새벽 도청시민군 무기 강제 회수 임무를 맡은 군인들이 도청 뒷담 쪽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조선대 4학년 학생 위성삼이 50여명의 시민군을 10명씩 도청 정문 바깥쪽에 배치하였습니다. 1989년의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위성삼은 자기가 도청 경비 병력 배치를 끝내자마자 도청시민군들이 도청 정문 바깥 시민군들을 향해서 M16으로 총을 쏘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박남선은 1988년 신동아 5월호에 기고한 수기에서 자기가 정문 바깥 분수대 방향으로 총을 쏘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2014년의 저서에서 자기 지시를 따라 도청시민군들이 분수대 쪽으로 총을 쏘았다고 기록합니다. 바로 그때 기동타격대 제1조 조장 이재춘은 분수대 화단 뒤에 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있다가 두 명이 푹 고꾸라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이 통역을 하셨던 5월 26일에는 시민군을 기동타격대라고 불렀으니 기동타격대 대장이 시민군 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동타격대 대장이 19세의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모집한 대원들 대다수가 16세의 청소년들이었습니다. 23세로 가장 연장자였던 염동유는 도청시민군들이 도청 정문 바깥 쪽의 자기 편을 향해서 총을 쏘는데 너무 화가 나서 도청 정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서 “어디 대고 총질이냐? 모두 다 죽인다!”고 악을 썼습니다.

    도청 건물 안의 두 구의 시신은 도청시민군 총기오발사고 희생자들이었습니다. 1988년 월간 국민일보 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위성삼은 시민군 상황실에 시민군 총기오발사고 희생자 한 명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그 희생자는 집이 광주에 있는 동국대 1학년 박병규였습니다.

    상무관 쪽에는 기동타격대 대원 김현채 등 시민군들만 있었는데, 신만식은 자기가 상무관 쪽을 향해 M16 총을 쏘았다고 증언합니다: “나는 본관 2층 복도에 서서 상무관 쪽을 향해 M16 총을 있는 힘껏 드르륵 드르륵 긁어댔다.” 박남선도 2014년의 그의 저서에서 도청 본관 2층 복도에서 신만식이 자기 옆에서 M16을 긁어대었다고 증언합니다.

     심지어 기동타격대 대원들도 서로 자기들끼리 총을 쏘았습니다. 상무관 쪽에는 김현채 등 기동타격대 대원들이 있었는데, 기동타격대 제1조 조장 이재춘은 자기가 상무관 쪽을 향해 총기난사한 무용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지원병들이 총을 맞기 전까지만 해도 상무관 쪽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편인 줄 알고 군인들을 향해 군인들의 동태를 묻기까지 했다. 지원병 2명이 죽자 나는 무조건 상무관 쪽을 향해 총을 갈겨 대고 낮은 포복으로 도청 안으로 들어왔다. (이재춘 1989)

     기동타격대 제7조 조장 김태찬(당시 19세) 등 2층 복도 대원들이 모두 총구를 도청 정문 쪽으로 겨누고 있다가 공격개시명령과 더불어 집단 발포를 하였는데, 그 총탄은 모두 도청 정문 쪽의 자기 편으로 날아가는 총탄이었습니다.

     임수원 중령이 인솔하는 70 여명의 3공수 11대대 특공중대는 어둠 속에서 도청시민군들이 자기 편을 향해 총기난사 하다가 탄창의 실탄을 거의 소진한 후, 즉 새벽녘에 도청 뒷담을 넘어들어왔으며; 군인들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도청시민군 모두 순순히 항복하였기 때문에 도청 안에서는 전혀 국군과 시민군 사이의 전투가 없었습니다.

     1980년 5월 25일 오후에 광주에 도착하신 인요한 선교사님이 광주해방구 첫날인 5월 22일 상황을 아십니까? 광주시민들은 하루사이에 세상이 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도청 공무원들과 시청 공무원들이 모두 쫓겨나고, 시민들도 도청과 시청 출입이 금지되고, 총을 든 민간인들이 도청과 시청을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광주해방구 설치는 광주가 대한민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였기에 그것을 난감히 여기는 시민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때 윤상원의 조직이 오전 10시 45분에 연세대와 고려대 학생 1천 6백명이 논산에서 광주로 출발하였다고 홍보하더니 오후 3시에 연세대와 고려대 학생 5백명 환영식을 주최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5백명 환영식이 광주 민심에 주는 영향은 컸습니다. 대학생들로 구성된 서울에서 온 지원군 5백명은 광주혁명의 성공을 보장하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왔다는 그 5백명의 대학생들은 가짜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광주 토박이인 김영택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에 따르면 5월 22일의 환영식 후부터 가짜 대학생 5백명은 이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복면을 하고 다녔습니다.

     궐기대회 장소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3인조 무장시민군은 기관총을 설치한 10호차 시민군 트럭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광주시민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이 자들이 서울의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이 맞다면 30년 후 북한의 광주인민봉기 30돐 보고대회에 참석하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북한이 광주사태에 개입할 염려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시는 인요한 선교사님은 무장봉기에 의한 혁명을 지원해 달라는 남민전의 편지를 김일성이 묵살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김일성은 이미 1978년 연초에 남민전에 혁명 지원을 공개적으로 약속하였으며, 1980년 5월에는 광주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즉시 사흘 내로 한국 전 영토를 점령할 목표로 남침할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습니다. 미 국방부 정보국인 Defense Intelligence Agency의 1980년 5월 19일자 보고서는 그 날 평양 주석궁에서 열린 비밀군사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Summay: On 19 May 80, Amidst the student demonstrations and subsequent riot in Kangju, KS, a secret meeting was held at the KN Presidential Mansion between KN President ((Kim)) Il-Song (6855/2480/2052) and KN Minister of People's Armed Forces ((30)) Chin-U (0702/2182/1342) and other KN leaders (nor further identified). Exactly what was discussed at the secret meeting is not known. However, the meeting was presumed to have covered the course of future KN actions in connection with the riot in KS. The KN leaders allegedly decided “not to refrain from invading KS, if the Kwangju riot developed into a nationwide popular revolt.” 요약: 1980년 5월 19일, 남한에서 학생 데모 및 잇따른 광주폭동이 일어난 와중에 북한 주석궁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오진우 무력부장 및 기타 (성명 미상의) 북한 수뇌부가 회동하여 비밀회담을 하였다. 그 비밀회담에서 정확히 무엇이 논의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회담에서 남한에서의 폭동과 관련하여 북한이 장차 취할 행동 방침이 다루어진 것으로 상정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북한 수뇌부는 "광주폭동이 전국적인 민중반란으로 번지면 즉각 남침하기로" 결정하였다.

    6·25전쟁 때 북한군과 한 편이 되어 유격전으로 후방교란작전을 하던 빨치산 세대가 1980년 봄에 조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최규하 과도정부 시기가 제2의 빨치산 투쟁을 위한 결정적 기회로 보고 있었으며, 김일성은 광주 일원의 무장폭동이 서울로 확산되거나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면 즉시 남침 명령 단추를 누르려 하였습니다.

    1979년에 이란에서 회교도 시위대가 미국대사관을 점거한 사건이 있었는데, 1980년 5월 15일에 윤상원과 이태복의 좌익 노동자 조직이 미국대사관 담장을 넘으려 시도했습니다. 그날 그들은 중앙청과 방송국과 청와대를 점거하고, 최규하 대통령 중동 순방을 절호의 기회로 국가를 전복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권 대학생 연합 시위 대표였던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그날 밤 9시경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대 해산 광고를 하였기에 윤상원과 그의 동지들의 5월 15일의 국가전복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실시된 비상계엄 전국확대에도 불구하고 윤상원이 최규하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려던 그의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간 것이 5·18광주사건입니다. 5월 15일 서울에서 미국대사관 점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나 윤상원은 광주에서 미국인들을 인질로 삼으려는 시도를 5월 22일에 다시 시도하려 하였습니다.

     5월 22일에 윤상원은 가짜 대학생 5백명 환영식을 개최하는 한편 후배들에게 광주에 있는 미국인들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윤상원에게 미국인 인질이 왜 필요하였을까요? 이란의 회교도 혁명세력처럼 윤상원도 미국을 상대로 협상하는 혁명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신 기자들을 이용한 언론 플레이를 하여 미국이 국제여론의 압박을 받게 하면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이라는 것이 윤상원의 계산이었습니다.

    조선대 민투 멤버들 중에 선교사님 순천 친구가 있었고, 조선대 민투를 조직한 김현장은 훗날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를 주동하였던 반미주의자였습니다. 지프차에 가짜 외국인 전용 번호판을 달고 순천에서 출발하여 한국말을 못하는 미국 대사관 직원인 척하며 광주로 온 선교사님은 검문소에서 “양림동 미국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광주로 가는 길”이라는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윤상원이 바로 사흘 전에 양림동 미국 선교사 체포령을 내렸었는데, 선교사님은 그 체포령을 내린 자의 통역이 되기 위하여 광주로 가는 길에 검문소에서 “양림동 미국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광주로 가는 길”이라는 거짓말을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5월 22일에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5·18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의 형 윤광장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왜냐면 21일 날 저놈들이 그렇게 도청을 비우고 가고 22일 날 학생들, 시민들이 다시 도청을 장악하고 있을 때 우리들이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장기적으로 갈라면 미국 시민권 가진 사람들을 인질로 잡이야 한다. 양림동에 [미국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양림동에 가니까 한 놈도 없이 다 피해브렀어.”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1979년의 이란 회교도 혁명 방식대로 미국인 인질을 사회주의혁명에 이용하려 하였던 사실에 대해서는 황석영도 기록을 남겼습니다. 황석영은 그가 1988년 겨울에 김일성의 지시로 밀입북하기 전에 월간지에 기록한 글에서 그 일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광주에서 봉기했던 항쟁지도부는 이 점을 눈치채고 이란에서의 방식대로 미국인을 인질로 카터 행정부와 밀고 당기면서 군사정권의 퇴진과 계엄군의 철수와 식량수송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지속시킬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당시로서는 대중들의 정치의식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서 결행하지 못했습니다. 광주에 살던 미국인들을 일단 미 공군기지 안으로 대피시킨 미대사관의 조치는 그쪽에서 먼저 이러한 점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는 경우지요.

     하마스가 지난 10월 7일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국민들을 인질로 납치한 것처럼 만약 윤상원이 계획대로 광주에서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할 수 있었더라면 광주사태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미국 정부가 미국시민 긴급 대피령을 내린 사실은 "Evacuation of Americans from Kwangju"라는 제목의 5월 23일자 미 국무부 문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5월 21일에 광주의 모든 미국시민 소개령을 내린데 이어 전라도에 거주하는 미국인들도 모두 떠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미국 정부의 권고를 따라 전라도를 떠나기는커녕 미국대사관 직원을 사칭하고 광주로 가셨습니다.

    광주해방구가 설치된 5월 22일 다수의 광주시민들에게 광주해방구는 비정상으로 보였습니다. 왜 민간인들이 도청과 시청을 총으로 지배하며 공무원들을 모두 내쫓았는지, 왜 일반시민들의 도청과 시청 출입을 통제하는지, 왜 민간인들이 군용차량을 타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5월 22일에 그런 비정상이 정상처럼 보이게 하는 윤상원의 방법이 서울서 대학생 5백명이 왔다는 가짜뉴스였습니다. 5월 23일에는 광주의 무장시민들과 미국은 한편이라는 느낌을 주는 거짓말, 즉 미국이 항공모함 두 척을 지원군으로 보내주었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렸습니다.

     광주무장봉기를 사전 조직한 세력과 빨치산은 반미친북 사상 및 인민민주주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시민군 대변인이라고 부르시는 윤상원의 상관이 여순반란사건 때부터 빨치산이었던 김세원 이었습니다. 인요한 혁신위원장님은 지난 11월 14일에는 1948년의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단에 헌화하고 분향하며 "우리가 빚진 사람을 잘 모셔야 한다. 격상해야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다수의 국민들 귀에 그 말은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며 제주 4·3 반란사건을 일으킨 남로당과 빨치산에 우리가 빚을 졌다는 말”로 들릴 것입니다.

    빨치산 정신을 이어받아 남한에서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실현코자 했던 자들이 1975년에 베트콩, 즉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적화통일 성공에 고무받아 1976년에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을 조직하고, ‘민주투쟁위원회’를 남민전 중앙위원회 직속 조직으로 두었습니다. ‘민주투쟁위원회’ 회원을 ‘민주투사’라고 불렀는데, 빨치산처럼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남한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투쟁하는 투사라는 의미입니다.

     윤상원은 자기가 5월 25일 밤에 그가 조직한 임시 혁명정부 기구 명칭을 ‘민주투쟁위원회’로 정하였습니다. 1980년 봄의 ‘민주투쟁위원회’의 목적은 최규하 과도정부가 약하다는 점을 노린 정권 교체였다는 점에서 ‘민주투쟁 위원회’는 혁명조직이었습니다. 그런데 윤상원 일당은 단순한 정권교체만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체제 전환을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주 투쟁위원회’ 명칭을 윤상원이 5월 25일 밤에 처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윤상원이 5월 22일 서울에서 왔다는 가짜 대학생 5백명을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이라고 소개하며 환영식을 개최하던 날 전주에서 김현장은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제목의 유언비어 삐라를 대량 제작하여 23일부터 광주와 전국으로 보내었습니다. 선교사님이 5월 24일 순천에서 들으셨다는 광주사태 소문의 진원지는 광주가 아니라, 전주였습니다.

     김현장은 “부마사태 때에는 전라도 출신 군인들을 진주시켰고, 금번 광주 살륙작전에는 경상도 출신의 공수부대들을 투입시켰다”라는 말로 지역감정을 자극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자기 편으로 간주하는 정승화 전 참모총장 본인이 그의 자서전 23~24페이지에서 공수여단이 가장 신속하게 투입될 수 있는 부대이기에 부마사태 때 자기가 공수단 투입을 지시하였다고, 즉, 10월 17일 밤에 최세창 3공수여단장에 직접 지시하여 1개 공수여단을 부산으로 공수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광주사태 당시 계엄사령관은 정승화의 부하 이희성 계엄사령관이었고, 그는 자기가 모시던 상관이 부마사태 때 하였던 전례를 따라 광주사태 때 공수단을 투입하였습니다. 더욱이 전라북도 금마에 소재한 7공수여단은 병력 70프로가 전라도 출신으로 구성된 전라도 부대였음에도 김현장은 그들이 경상도 출신이라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습니다.

     그런데 조선대 민투가 가짜뉴스 유포하며 유혈폭동을 선동하는 유인물을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로 제작한 것이 5월 22일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김일성이 광주사태가 확산되면 남침하겠다고 한 바로 그 날 5월 19일에 조선대 민투는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 등의 제목의 성명서들을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로 발표하며 유혈 무장폭동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김현장과 윤상원이 각각 우연히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주투쟁위원회는 김일성주의자들로 구성된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이 1976년부터 사용한 명칭이었습니다. 민주투쟁위원회 본질은 빨치산 정신을 이어가는 자들이 인민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을 함께 하려고 뭉친 집합체였습니다.

     5·18 유공자는 국가유공자라고 하시는 인요한 혁신위원장님께 5·18 유공자 선정 기준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현장은 광주사태가 끝난지 근 2년이 지난 1982년에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주동자였다는 것을 공적의 근거로 5·18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주동자가 국가유공자라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반미를 국시로 삼는 북한 논리로 그가 5·18 유공자가 된 것인가요? 도대체 5·18 유공자 선정 기준이 무엇입니까? 아울러 선교사님 지인들 중에서 광주사태를 즈음하여 광주와 순천을 오갔던 조선대 민투 요원 최상철과 이강래는 도대체 무슨 공적으로 5·18 유공자가 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인요한 선교사님은 시민군들이 반공 구호를 외쳤으므로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을 하시는데, ‘김일성은 오판 말라’ 구호는 미리 준비된 정체위장용 구호였음을 윤한봉이 이미 2006년에 구술증언으로 밝힌 것을 여태껏 모르시는가요? 선교사님이 영어 통역을 하신 궐기대회에 참석하였던 대동고 학생 윤기권은 훗날 1991년 2월에 시민군 활동 보상금 2억원을 수령한 후에 어버이 수령 품을 찾아 월북하여 북한의 5·18홍보원이 된 후 남한의 5·18 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전라도 농민들을 무장봉기에 동원하였던 서경원은 1980년 대에 북한공작금을 받고 있었으며, 1988년에는 평양에서 김일성한테서 직접 5만불을 받은 후 5·18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광주사태가 끝난지 어언 40여년이 지났는데도 해마다 5·18 유공자 수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의사에게 돈을 주고 허위 진단서를 발급받거나 광주단체들에게 돈을 주고서 5·18유공자가 된 이들이 있습니다. 5·18 유공자 신분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이라면 국가유공자 신분이 상품인가요?

    인요한 선교사님은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시니까 5·18 성명서에서 ‘행동 강령’이란 단어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광주사태가 폭동인지 민주화운동인지 여부는 우리가 5·18 성명서를 읽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5·18 성명서와 더불어 광주사태가 시작되었으며, 광주 5월 정신은 5·18성명서에 담겨 있습니다. 자, 이 성명서에 명시된 행동강령은 학생이 쓴 행동 강령인가요 아니면 빨치산이 불러준 대로 받아쓴 행동 강령인가요?

     김현장의 조직이 작성한 5·18 성명서에도 윤상원의 조직이 작성한 5·18 성명서에도 공통적으로 ‘민주투쟁위원회’ 명의와 행동 강령이 있습니다. 여기서 “무기를 제작하라!” “전 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등의 행동 강령은 누군가가 80만 광주시민들에게 내리는 지령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어른들에게 “무기를 제작하라!” “전 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등의 지령을 내릴 수 있나요?

광주폭동을 선동하는 5·18성명서

     만약 무기를 제작하고,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하여 폭발장치를 설치하고, 관공서를 불태우고, 군용차량을 탈취하고, 군 무기를 탈취하여 국군을 공격하는 폭력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논리라면 빨치산들이야말로 가장 민주화운동을 많이 했다는 논리가 됩니다.

     행동 강령을 보시면 빨치산의 1980년 유격작전을 위한 강령입니다. 첫번째 행동 강령이 “무기를 제작하라!! (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준비)”인데, 이것은 빨치산 유격전 유경험자만 내릴 수 있는 명령입니다. 무기 제작은 빨치산 고유의 기술이었고, 학생들은 어떻게 무기를 제작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전 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도 도저히 학생이 시민들에게 내릴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외신기자들을 위하여 윤상원의 말을 영어로 통역하신 바로 그 날 김현장은 윤상원을 만나 외신기자들을 인질로 납치하자는 제안을 하려 하였습니다. 김현장은 시민군 간부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도청을 지켜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광주 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도청에다 모아 그들의 숙소로 꾸며주고 함께 지내는 일입니다. 좌우지간 외국인이라면 신문기자들까지도 모두 인질로 잡아두어야 합니다 ……세계의 여론이 광주 시민들 편에 서게 되면서 협상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종결될 겁니다.”

    미국인들을 인질로 붙잡아 도청에 가두고 협상을 하면 세계 언론이 집중하고, 세계 여론이 시민군 편이 되어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김현장의 계산이 윤상원이 5월 22일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하였던 이유와 일치합니다. 과연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윤상원, 김현장, 윤광장, 황석영이 모두 미국인 인질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1988년 12월 6일의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한상섭은 자기가 광주사태 발생 한 주 전인 1980년 5월 11일에 송선태와 함께 전남대 학생 사무실에서 작성한 무장폭동계획서는 대전의 전국 가톨릭농민회 본부에서 시키는 대로 작성한 것이었다는 증언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 대전의 전국 가톨릭농민회 본부에서 6월 초에 김현장을 숨겨주었습니다. 김현장이 전국 가톨릭농민회 사무실 간사 오상근의 자취방에서 한 주를 지내는 동안 평양방송을 청취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양방송 내용에 선교사님의 조선대 친구가 소속되어 있던 조선대 민투가 수사 대상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일전에 인요한 선교사님께서 광주사태를 주제로 공개토론을 제안하셨습니다. 김현장이 5월 22일 전주에서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이란 제목으로 작성한 유인물 내용에 대한 공개토론을 제안 드립니다. 만약 선교사님께서 그 유인물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하신다면 선교사님이 이기시는 것입니다. 만약 김현장이 지어내 전국에 퍼뜨린 악성 유언비어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면 반드시 사건일자와 장소가 있을 것이며 피해자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사건일자와 장소와 피해자 이름을 선교사님이 제시해 주시면 선교사님께서 간단히 이기실 수 있는 공개토론입니다.

    국군에 학살 누명을 씌우는 유언비어를 큰 목소리로 퍼뜨린 세력이 한국에서 승자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가들과 기독교인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합니다. 김현장이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은 아주 긴 성명서인데, 그 중 대검 학살 부분에 대해서만이라도 인요한 의료선교사님께 사실 확인을 해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서울에서 급파된 3천여 명의 공수특전단들은 대검을 빼어들고 미친 망나니처럼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군 트럭에다 내어 던지고 그것도 부족하여 달아나는 시민들과 어린 여학생들을 대문까지 부수고 끌어내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이러한 만행에 항거하는 시민들과의 싸움 중에 공수부대의 칼에 맞아 죽은 젊은이들의 시체가 대합실에 즐비하였고,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는 밤늦게까지 길가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 둘째 여학생 운운한 부분은 광주역 앞 분수대에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김현장이 작성한 광주사태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

    이 유인물을 김현장이 5월 23일에 살포하기 시작하자마자 평양방송이 낭독하였는데 대검에 1만 3천명이 찔렸는데, 그 중 2천명이 즉사했다는 내용을 북한 억양으로 낭독하였을 때는 작성자인 김현장 본인이 듣기에도 섬뜩한 괴담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신이 나서 정규방송을 중당하고 연일 낭독한 대검에 의한 광주대학살설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광주사태 때 허리에 대검을 찬 군인들은 광주시민들이었습니다. 5월 18일 오후 2-3시경 군용트럭을 타고 광주은행 본점 앞으로 출동한 병력 175명은 광주시민들로 구성된 방위병들이었습니다. 즉, 광주소요 진압을 위하여 최초로 동원된 계엄군은 전원 광주시민들로 구성된 방위병들이었습니다. 방위병들은 현역 복장을 하고 허리에 대검을 차고 있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이 대검을 보았다면 광주의 방위병들이 차고 있던 대검이었으며, 그들은 인요한 선교사님과 동향인 순천 출신 정웅 광주향토사단장의 지시로 동원되었습니다.

     이어 오후 5시에 정웅 사단장의 명령으로 동원된 7공수여단 제33대대와 제35 대대는 전라도 병력이었으며 착검하지 않았습니다. 5월 19일 광주에 도착한 11공수와 20일에 도착한 3공수도 착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어깨에 총을 메고 있었으며, 총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끈으로 동여매었기에 착검이 불가능하였다는 것은 사진과 영상기록으로 확인하실 수 있는 사실입니다. 김현장은 그가 작성하여 전국에 유포한 유언비어 유인물에서 대검에 찔린 사망자 수가 2천여명, 대검에 찔린 부상자 수가 1만 1천여명을 헤아린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태껏 유언비어 유포 진영의 대변인 역할을 해오신 인요한 선교사님, 대검에 찔린 사망자 수가 2천여명이라는 것이 광주괴담입니까 아니면 팩트입니까? 김현장은 광주가 아닌 전주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그는 자기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김현장에게 누구에게서 들은 것을 쓴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본인이 지어낸 유언비어인지를 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 대검에 찔린 사망자 수가 2천여명이라면 반드시 희생자 이름이 있을 것이고, 찔린 장소와 날짜가 있을 것이며, 목격자가 있을 것입니다. 김현장은 유언비어 유인물을 5월 22일에 전주에서 작성하였습니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김현장의 유인물에 5월 19일과 20일 양일간에 대검에 찔린 사망자 수가 2천여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5월 19일과 20일 양일간 대낮에 금남로에서 단 한 명이라도 대검에 찔린 사망자가 있으면 사망자 이름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시위대가 던지는 화염병과 돌에 맞거나 시위대가 휘두르는 쇠파이프와 낫과 손도끼에 부상을 입은 군인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위대 편에서 대검에 찔린 희생자가 2천명은커녕 단 한 명이라도 있었습니까? 단 한 명이라도 찾아내시면 선교사님이 공개토론에서 이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못 찾아내시면 5∙18은 악성 유언비어에 의한 사기극이었음을 인정하여 주시겠습니까?

     인요한 선교사님도 광주사태 희생자 수를 6백명으로 부풀리려 하시기에 질문드립니다. 5월 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하기 전에 단 한 명도 대검에 찔린 사망자가 없었음에도 김현장은 2천여명이 대검에 찔려 사망하였다는 유언비어를 지어냈습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사망자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희생자 수를 뻥튀기기하는 것을 혁명 전략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5월 21일에 집단발포 희생자가 있었다면 김현장이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 주장을 하기에 아주 좋은 소재였을텐데 어째서 일절 그 언급이 없었을까요?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는 가해자가 시민군이었던 사건의 누명을 국군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여러 해 지난 후에 생성된 유언비어였습니다.

     만약 영화에서처럼 공수부대 집단발포가 실제로 있었다면 희생자들이 똑같은 장소 금남로 1가에 똑같은 시간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사건 장소도 전혀 엉뚱하게 다른 곳이고, 총상이 아니라 시민군들이 낸 교통사고에 의한 타박상 희생자가 다수였습니다.

     당시 17세였던 나주의 5∙18유공자 이종연군은 5월 21일 군용트럭을 타고 나주 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하러 다니다가 나주군 왕곡면 장산리 소재 국도에서 운전이 미숙한 시민군의 과실로 발생한 교통사고 희생자였습니다. 제5공화국 이전의 시골도로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였기에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트럭을 몰다가 핸들을 갑자기 꺽으면 적재함 난간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고로 입은 전두골 함몰 골절이 이종연군의 사인이었습니다.

     당시 18세였던 해남의 5∙18유공자 황성술군은 운전면허가 없으면서 5월 21일 광주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한 레커차에 시민군 5명을 태우고 다니다가 22일에 광산군 동곡면 하산리 소재 동곡교 하천에서 추락 사고를 냈습니다. 이 사고로 황성술 본인을 비롯하여 시민군 5명이 하천에 가라앉은 레커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는데도 이런 대형 교통사고마저 공적으로 인정하는 5∙18유공자 선정기준이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영암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김영두군도 시민군들이 집에 가지 못하고 하고 해남 등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다가 22일에는 또 한 대의 시민군 레커차에 태우고 다니던 중 송정리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다리 밑으로 추락하는 교통사고를 내었을 때 레커차에 깔린 희생자입니다.

    당시 운동권 교사들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아니라, 빨치산 세대처럼 반미친북 성향이었습니다. 자기 제자들이 군용차량을 탈취하여 몰고 다니다가 교통사고를 내는 것을 방치한 대동고등학교 운동권 교사 박석무와 박행삼과 윤광장이 5∙18유공자들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도대체 대동고등학교 교사들이 무엇을 하였기에 5∙18유공자들인가요? 더구나 박석무는 여순반란사건 때부터 빨치산이었던 김세원과 더불어 광주사태 배후 세력이었습니다.

     5∙18열사로 알려진 전영진군은 대동고 운동권 교사들의 제자요, 훗날 월북한 윤기권과 좌파 정치인이 된 송영길의 동창생이었습니다. 그는 운전을 할 줄 모르는 대동고 학생이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하여 몰고 다니던 군용트럭 타고 다니다가 대동고 학생의 운전미숙으로 발생한 교통사고 희생자였습니다. 전영진의 반 친구가 군용트럭을 몰고 노동청 앞 도로에서 도청 쪽으로 급회전하였을 때 트럭 적재함에서 아스팔트 도로로 떨어지는 충격으로 입은 뇌좌상이 그의 사인이었습니다.

    인요한 선교사님, 이렇듯 시민군들이 낸 교통사고 희생자들의 가해자는 누구인가요? 아무리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레커차와 군용트럭 등 군용차량을 몰고 다니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요?

    5월 21일 오후 1시경에 금남로에서 들린 총성은 공수부대가 쏜 총성이 아니라, 시민군들이 가톨릭센터 7층 옥상에서 금남로와 도청 방향으로 집단 발포하는 총성이었습니다. 그때 도청광장 군인들의 총은 실탄이 없는 빈 총이었습니다. 모두 빈 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장난동자들의 총은 실탄이 장진된 총이었습니다. 청소년들도 실탄이 장진된 총을 지급받았습니다. 전남고 2학년 시민군 김수영군은 5월 21일 낮에 실탄이 장진된 총을 소지한 채 지프차를 타고 다니던 고등학생들이 고등학생들의 총기 오발사고로 사망하는 총기사고를 광주은행 일대에서 여러 번 목격하였습니다. 시민군 정준은 광주은행 앞에서 중학생이 어깨쭉지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가톨릭센터 7층 옥상 위 시민군들이 아래를 향해서 쏘는 총격만이 광주은행 앞 시민 어깻죽지에 총상을 입힐 수 있었습니다. 도청광장의 군인들 총은 실탄이 없는 빈 총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청광장에서 광주은행까지는 사정거리 바깥입니다.

     도청광장에서 광주은행까지는 사정거리 바깥일뿐만 아니라, 총알이 날아온 방향도 도청쪽이 아니었던 사실을 5∙18유공자 차용봉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무장을 한 시민군들 측면을 향해 총알이 계속 날아들었다. 계엄군은 분수대 주위에 있었기 때문에 총을 쏘면 시위대열 정면을 향해 총알이 날아왔을 것인데 자꾸만 옆에서 총알이 날아와 시민군의 오발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가톨릭센터 7층 옥상 위 시민군들이 아래를 향해서 총을 쏘면 금남로 시민군들은 위를 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 차용봉은 광주은행 본점 건물을 향해 총을 쏜 5∙18유공자입니다. 시민군들이 금남로 일대에서 고층건물들을 향하여 총을 쏘았을 때 무등맨션 6층 창가에서 금남로 상황을 구경하던 63세의 황호정 씨가 시민군 총에 맞았습니다.

     중졸 17세의 용접공 최인영은 동구청 옆 골목에서 금남로 1가 시민들을 향하여 총구를 겨누고 있었던 5∙18유공자입니다. 김대중 농민은 광주공원에서 어린 학생들의 총기오발사고가 많았다고 증언합니다. 재수생 시민군 장준영 등 여러 시민군들은 5월 21일 백운동에서 시민군들이 서로 시민군 쪽을 향해 쏘는 시민군 총격난사 사건이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인요한 선교사님이 5월 25일에 보신 희생자들 중에는 광주 건달 신만식 일행이 5월 21일 밤 학동에서 난사한 총에 맞은 희생자도 있었습니다. 1989년의 그의 5∙18 증언록에서 신만식은 그 날의 자신의 총기난사 무용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트럭을 그 주위에 놔두고 나는 그쪽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학강국민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에 모인 사람은 대략 70-80명가량 되었다. 대부분이 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나는 욕심도 많아 총알을 허리 가득히 두르고 군인들이 밤에 쳐들어온다는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한참을 지키고 있는데 누군가 군인들이 온다고 했다. 동시에 우리 쪽에서는 도로에 총을 갈겨댔다 (신만식 1989).

     군복을 입거나 국군 철모를 쓴 시민군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민군들도 군용지프를 타고 다니거나 군복을 입은 사람을 멀리서 보았을 때는 군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멀리서 보이는 시민군을 군인으로 착각하였을 때는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5월 22일 낮에 동신고 일대에서도 그런 총기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중학교를 중퇴한 용접공으로서 5∙18유공자가 된 김용균도 그 목격자들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동신고 인근에서 국군 철모를 쓴 시민군과 총격전을 벌인 시민군들 중에는 청소년 5∙18 유공자 김현채도 있었습니다. 김현채는 그 날 광주고 건너편 길바닥에서 시민군 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청년을 보았습니다. 그날 운암동에서 군용차량을 타고 다니던 시민군들은 서로 맞은편 시민군 차량을 계엄군 차량으로 오인하고 시민군끼리 벌인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그 날 전남대학교 앞에서도 김유곤 등 해남시민군들이 발사한 오발탄에 시민 두 명이 쓰러졌습니다. 5∙18유공자 정영동은 그 날 무등도서관 인근에서 시민군 총에 맞은 사람이 운명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사실을 부인하시는 인요한 선교사님, 그럼 평양방송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광주시민들을 대상 청중으로 하는 광주인민봉기 실황중계방송을 한 것은 무엇인가요? 더구나 김현장이 작성한 유언비어 유인물을 반복하여 방송하였습니다.

     광주사태가 끝난지 사흘쯤 지나서 김현장이 대전에 도착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여전히 평양방송에서 평양방송 특유의 가슴을 얼어붙게 하는 억양으로 낭독한 것입니다. 몇 옥타브나 올라간 날카로운 목소리에다 도당 괴뢰놈들이라는 전투적이고 원색적인 욕을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기에 김현장 본인도 섬뜩함을 느꼈을 정도였습니다. 전주의 문정현 신부와 익산의 박창신 신부가 그 유언비어 삐라를 5월 23일 전국에 살포하기 시작하자마자 평양방송이 정규방송 대신 낭독하였으며, 북한 전 지역에서 광주인민봉기를 지지하는 군중대회가 조직되었고, 6월 초에도 여전히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수사당국으로서는 조선대 민투가 김대중의 민중봉기에 의한 집권전략을 실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현장이 유언비어 삐라를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로 제작하였고, 평양방송에서 그 명의까지 낭독하였기에 조선대 민투가 정보부의 수사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5월 19일에 전라도 지역에서의 대규모 민중봉기를 일으킬 만반의 준비가 끝난 후 서울의 조직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김현장은 김대중과 김상현을 만나러 서울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때 이경 등 조선대 민투 간부 3명이 김현장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5월 16일에 김대중은 최규하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는 수순으로서 최규하 정부에 신현확 총리 내각이 5월 19일까지 총사퇴하지 않으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었고, 최규하 정부는 정부전복세력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선택하고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는데, 이때가 김현장 일행이 서울 광화문에 도착한 직후였습니다. 그래서 김현장은 5월 18일에 김대중과 김상현을 만나려던 일정을 포기하고 남원을 거쳐 구례 천은사로 갔다가 문정현 신부가 있는 전주로 이동하였습니다.

     김현장의 고향은 해남인데 김대중의 민중봉기에 의한 집권전략을 광주에서 추진하기 위해 1980년 봄에 광주에서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5월 18일에 김대중을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광주로 되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결코 그가 광주에서 시민군 활동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1978년에 조선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김현장은 지극히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조선대 총학생회를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학생 신분이 아니었음에도 김대중과의 친분 관계를 과시하며 먼저 복적생 모임을 장악하였고, 조선대에서 총학생회를 없애고 민투를 조직하였습니다. 학생이 아닌 자가 학생회를 없애고 김대중의 민중봉기에 의한 집권전략 행동대로서 민투를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민중봉기로 최규하 과도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김대중 세력의 거사 계획 D-Day는 5월 19일이었고, 그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을 때는 주동자들은 도피하라는 사전 지시가 있었습니다. 수사당국 편에서는 김현장과 그의 민투가 전라도서 민중봉기를 조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김현장이 자기도 예비 검속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하여 광주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렇듯 김현장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김대중을 위하여 최규하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의 핵심 주동자였기 때문에 광주사태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할 강한 동기부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그 유인물을 평양방송이 계속 방송하고 있었고,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로 작성된 성명서라는 것까지 평양방송이 밝혔기 때문에 그 명의를 사용한 김현장이 꼬리를 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김현장의 유인물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면 과연 평양방송이 정규방송 대신 김현장의 유인물을 방송하였을 리가 있겠으며, 김일성이 황석영에게 미화 수십 만 달러를 주며 김현장을 영웅으로 띄우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하였을리가 있을까요? 남북한 최초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서 김현장은 철우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https://youtube.com/shorts/Hn82yDUxT8Q )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는지 아니면 김대중의 내란이었는지는 5·18이전 성명서들을 읽어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광주사태는 5월 18일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열흘 전인 5월 8일의 제1시국선언문 낭독 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날부터 송선태 현 5·18 진상조사위 위원장이 무장 폭동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송선태가 작성한 무장폭동계획서를 주사파는 ‘무장봉기의 도상계획서’라고 불렀습니다.

     5월 15일의 제1시국선언문은 유혈폭동을 일으키겠다는 선언이었는데 이 선언문 전문은 빨치산 정신을 표현합니다. 당시 북한의 국화(國花)는 진달래였는데 적화통일을 염원하는 빨치산 정신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흘린 이 젊은 피가 통일 민주조국으로 가는 노정에 핏빛 진달래로 피어오르길 바란다!” 그런데, 제1시국선언문과 제2시국선언문 모두에 조선 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칭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듯 윤상원이 5월 25일에 임시혁명정부 명칭으로서 사용한 민주투쟁위원회는 그 날 처음 등장한 명칭이 아니라, 김현장의 조선대 운동권 조직이 4월부터 사용한 명칭이었으며, 김현장이 처음 그 명칭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빨치산 출신 김일성주의자들이 1976년에 조직한 남민전 산하 조직 명칭이었습니다.

     5월 27일 새벽 도청 구간 희생자들은 모두 시민군 총기난사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이른바 도청시민군의 도청방어작전이라는 것이 도청 정문 앞에 방어진을 구축한 후 도청 본관에서 방어진의 자기 편 쏘기였습니다. 도청시민군 태반이 난생 처음 총을 만져보며 전혀 총기를 다룰 줄 모르는 청소년들이었습니다. 2011년의 리비아전쟁에서 시민군이 승리한 후에 리비아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되었습니까? 시민군이 승리한 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민군끼리 서로 총을 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의 완성인가요? 광주사태 때도 민간인 총기 무장이 시작된 직후부터 시민군들은 시민군끼리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런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을 도청 구간에서 한 사건이 바로 5월 27일 새벽에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5월 26일에 인요한 선교사님이 보시기에도 시민군이 국군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승산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들불야학 청소년들을 제외하면 시민군이 윤상원의 통제 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윤상원이 생각하는 이기는 방법은 따로 있었습니다. 윤상원은 시간을 끌면 시간은 자기 편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윤상원은 광주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될 때까지 시간을 끌어도 자기가 이기고, 광주사태가 외신기자들의 보도로 전세계로 보도될 때까지 시간을 끌어도 자기가 이긴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윤상원의 생각이 5월 26일 밤 인요한 선교사님의 외신기자회견 통역 후 윤상원이 도청 앞에 붙인 대자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시민군 지도부는 뉴욕타임즈 기자와 회견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미국이 광주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곧 개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미국이 광주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곧 개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확인했습니다”—이 말이 가짜뉴스라는 것을 가장 잘 아실 분이 통역을 맡았던 인요한 선교사님입니다. 그러나 윤상원의 정세 판단이 반영되어 있는 가짜뉴스였습니다. 선교사님의 통역 도중 윤상원은 외신기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자기가 말한 광주 학살 프레임대로 외신기자들이 곧 보도하면 국제 여론의 압력으로 미국 정부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협상이 시작되면 미국은 자기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미국을 이용하여 광주혁명이 완성될 수 있을 것으로 윤상원은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윤상원은 1979년의 이란 회교도 혁명 방식이 1980년 5월의 광주에서도 통하고, 자기가 미국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월 26일이 바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도청시민군의 인민재판에 대하여 보고한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에 미국대사가 시민군 지도부의 협상 제의에 응할 수 있었겠습니까?

(2024년 1월 16일 방송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