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국무회의에서 12.12 사태까지의 전개과정

10.26국무회의에서 12.12사태까지의 사건 전말
 

10.26, 국무회의


김계원 비서실장의 비상소집에 오후 8시 25분부터 8시 40분 사이에 최공수, 고건,
유혁인 등이 나왔고, 수석비서관들이 나왔다.
8시 40분, 최규하 국무총리가 나오자 김계원은 다른 사람들을 부속실로
내보낸 후 총리에게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만찬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다가 김재규가 잘못 쏜 총에 각하가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오후 9시5분, 구자춘 내부, 김치열, 법무가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각하가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뛰어와 김계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김계원은 “간신배를 제거한다는 것이 각하가 다치셨다”라고만 말했다.
법무장관이 “차지철이 그 새끼 무엇을 했어”하고 흥분하자
김계원은 “죽었는지 모른다”라고 답했다.

오후 9시를 조금 넘은 시각, 국무총리가 청와대에 도착한지 10~20분 정도가
경과한 다음 김계원은 육군총장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받고 보니 김재규였다. “지금 육군본부 방카에 참모총장이 있고,
곧 국방장관(노재현)도 올 것이니 총리 모시고 바로 B-1 방카로 오십시오.”

김계원이 총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총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어서 김계원이 총리에게 말했다:
“김재규가 청와대 경호실이 무서워 못 오는 것 같습니다. 빨리 계엄부터 선포하여 치안을 유지해야 하니 그리로 가시지요” 총리와 장관들이 따라 나섰다.

9시 40분, 국방장관실에는 총리, 국방,내무, 외무, 법무, 문공, 서종철특보, 유혁인정무, 김재규, 김계원, 정승화, 신현확 부총리가 있었다.

김계원이 총리에게: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면 국무회의를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리:
“물론이지요. 계엄 사유를 무엇으로 할까요, 유고로 할까요 서거로 할까요.”

김계원:
“대통령각하 유고로 인하여 27일 00:00부로 계엄을 선포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최규하 총리:
“유고만 가지고 납득하겠습니까? 무언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무위원들도 내용을 알아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지요.”

김재규:
“유고는 안 됩니다. 국내치안이 좋지 않아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최규하:
"국내에 데모가 난 것도 아니고, 계엄이 선포된 부산도 조용한데 그건 이유가
안 됩니다. 대통령 유고를 어떻게 국민에 안 알리겠습니까?
계속 보안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며 우선은 국무위원들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김재규:
“왜 안 됩니까? 소련은 1주일 이상이나 브레즈네프의 행적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는데 2-3일 동안 왜 보안유지가 안 됩니까?”

최규하:
“그러면 김부장이 국무회의에서 사유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김재규:
“예, 하지요”

26일 오후 11:30분, 국방부에서 국무회의가 열렸다. 신현학 부총리를 포함한
국무위원들이 반발을 했다. “대통령 사망여부부터 확인해야겠다.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면 그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다.
계엄을 선포하기 전에 병원부터 가봐야겠다.”

국무위원들이 이렇게 반발하자
“대통령 시해 사실을 숨긴 채,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던 김재규의 의도가 좌절됐다. 사태추이에 민감한 김계원은 이런 사실을 즉시 간파하고 마음을 바꾸었다.

26일 오후 11시40분 김계원이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을 불러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렸다.
박대통령 시해현장을 지켜본지 4시간만의 일이었다.
노재현은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즉각 체포하라고 지시했지만 정승화는 시간을
끌며 미온적인 자세를 취했다.

최규하 역시 회의를 주재하다가 10월 27일 00:25분에 김재규가 있는 국방장관실로
가서 김재규에게 중간보고(?)를 했다.
“비상계엄은 27일4시를 기해 선포하기로 했다.” 이는 그 후에 ‘촌극’이었다는 비아냥을 받고 있다.

전광석화같은 전두환

보안사가 시해소식을 들은 것은 시해사건 발생 40분 후인 오후 8시20분이었다. 김계원이 시신을 싣고 국군서울지구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7:55분,
병원을 가려면 보안사 정문을 통과해야 했다.
당직총사령은 이상연 대령이 군의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중앙정보부 요원이
밀착감시를 하기 때문에 군의관의 대답이 엉거주춤했다.
“코드원(대통령)이냐, 위독하시냐” 했더니 군의관은 “예‘라고만 대답했다.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에 전화를 걸었지만 경호실장은 물론
차장과도 통화하지 못했다. 그 다음의 보고가 들어왔다.
“노재현 장관이 보안사령관을 찾고 있습니다.
정승화 총장이 각군 수뇌부를 B-2방카로 소집하고 있습니다.”

오후 9:00시, 전두환이 B-2방카에 도착했다.
이때 김계원과 최규하는 청와대에 있었다.
정승화 총장이 독자적으로 상황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카에는 노재현, 김재규, 군수뇌부가 있었다.
전두환이 노재현에게 ‘대통령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노재현은 “대통령이 서거했다. 자세한 건 모른다”고 일러주었다.
전두환이 대통령 서거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한 시점이
바로 오후 9:00시 경이었다.
이 때부터 전두환은 발빠르게 육군본부 보안대 사무실에 임시 지휘본부를
차리고 사태 파악에 나섰다.

11:40에 노재현이 전두환을 호출했다.
“정승화의 지침을 받아 김재규를 체포하라”.

한편 노재현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정승화는 헌병감 김진기를 불렀다.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김재규를 연행하여
보안사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했다.
1980년 3월 7일의 정승화내란방조사건 제2차 공판에서 김진기는 이렇게 진술했다:

"11:40-50분경, 총장으로부터 체포지시를 받았다.
이유는 모르고 그냥 '잡아오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구나 생각은 했지만 각하에게 이상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체포해서 보안사령관에게 인계하라고 했다. 헌병 10명에 무장을 지시했다.
'정중히 대하라'고 말했다. 난폭하게 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1979년 11월 1일의 참고인 진술 때 정승화는 이렇게 말했다:
"헌병감도 부르고 따로 보안사령관도 불렀다. 헌병감에게는 몸수색부터
하라고 했고 보안사 안가에 수용 구금하라고 지시했다."

전두환은 육본 총장실로 가서 정승화를 만났다.
정승화는 체포지침을 내리지도 않고, 사태의 경위를 알려주지도 않았으며,
조사하라는 지침도 내리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했다. “국방장관실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있다.
헌병이 체포하면 인계받아 보안사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
 국방장관과 총장의 지시내용이 전혀 달랐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전두환은 육군본부 보안대장실 오일랑 대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국방장관실에 김재규가 있다.
육군총장이 찾는다는 구실로 유인하여 보안사 안가로 연행하라.”

후일 12월 15일의 '내란방조사건 조사에서 정승화는 이렇게 진술했다:
"후에 김재규 세력이 나타날지 몰라 후환이 두려웠다.
그래서 보안사령관에게'신변을 인계받아 방카에 수용하고 정중히 대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전두환이 김재규 연행 명령후 김계원과 함께 김재규 체포 여부를 기다라고 있는데
27일 00:40경, 헌병감(김진기)이 김재규가 가지고 있던 38리벌버 권총을 가져왔다. "김재규는? "하고 물으니까 "체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안가에 유인된 김재규는 제1성을 이렇게 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나에게 협력하라.”

수사관들은 김재규의 언행으로부터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이는 즉시 전두환에게 보고됐다.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대통령 시해범은 김재규입니다.
구속해야 합니다”라며 압박했다. 정승화는 더 이상 저항할 면분이 없었다.
시해된지 만 6시간 후인 10월 27일 01:30분에 비로소 김재규가 구속된 것이다. 이와 아울러 국방부에서 열린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 04:00시를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최규하 권한 대행은 특별담화문을 발표하여 대통령 서거 사실을 공표했다.

반면 정승화는 만찬장 50m 거리에서 시해의 총소리를 들었고,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B-1벙커로 오는 도중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최규하나 국방장관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혼자 육본으로 돌아가 계엄선포 준비와 병력동원을 진행했다.

비상 국무회의가 열리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 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동안,
시해사실을 알고 있는 최규하, 김계원, 노재현, 정승화는
대통령이 어떻게 해서 서거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일려주지도 않았고,
그 자리에 있는 국무위원들 누구도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국무회의가 끝날 때까지 유고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공고 제5호에 의해 계엄사 내에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됐다.


===== 중략=====

합수부의 젊은 장교들은 정승화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히 챙겼다.
시간이 가면서 김재규의 자세가 바뀌엇다.
합수부에서는 “자신이 집권하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말하다가
정승화가 관할하는 법정에서는 ‘유신체제에 비수를 꽂기 위해 시해했다“고
말했다. 이를 재야가 부추기고 있었다. 구명운동도 활발해 졌다.
이어서 박대통령을 비난하고 김재규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김재규가 3김 불가론을 펴자
1주일 후에 정승화가 똑같이 3김 비토론을 주장했다.
쿠데타라도 불사하여 정치개입을 하겠다고도 했다.
실제로 정치개입을서슴치 않았다.
임시 대통령을 최규하로 할 것과 임기를 2년으로 할 것도
최규하나 국무위원들과 아무런 논의 없이 정승화가 결정했다.
김종필 후보선출을 무산시켰다.
공개적으로 김재규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방해했다.

이런 사항들을 종합해보고 합수부 젊은 장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승화를 연행하지 않고서는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공정하게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외에서 끈질기게 확산되는 의혹의 여론도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재야세력, 김재규, 정승화가 정국을 주도하여 불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누구도 이런 정승화에 제동을 걸 사람 없었다.
이학봉 대령은 몇 차례에 걸쳐 정승화의 연행 조사를 전두환에게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미루어 왔다. 그러나 합수본부장은 실로 어려운 결심을 했다.
“연행조사하자” 이는 김재규 심복들이 이끄는 수도권 정예부대들과의
전투행위까지 각오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래서 보안과 속도가 생명이었다.
빨리 연행하고 언론에 대서특필하면 기정사실화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정승화 총장 연행 계획

합수부는 정승화 총장 연행일을 12월 12일로 하기로 정했다.
12월 8일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차기 대통령(취규하)을 선출하는 날이고,
12월 12일은 육군진급심사 예정일이었기 때문에 방해가 되지 않는
12월 12일 밤을 연행 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12월 6일 전두환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정승화를 김재규 관련사건의 관련범’으로 연행수사할 수 있도록 재가문서를 작성하라 명했다.
군 주요지휘관에 대한 수사에 대해서는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관례에 따라 이학봉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12월 8일 전두환에 보고했다.
1) 대통령 보고 시점에서 정확히 30분만에 연행조를 총장공관에 보낸다.
2) 연행조는 우정율 합수부 수사2국장, 허삼수 합수부 조종통제국장 및 7명의
합수부 수사관으로 한다.
3)총장공관에는 1개분대 규모의 헌병이 특별경계를하고 있고 외곽에는
50여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주하기 때문에 수사관을 보호하고
통과로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합수부에 배속돼 있던
33헌병대 병력 60여병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

연행 시에 군의 반발을 예상하여 전두환은 수도권 부대의 주요 지휘관들을 .
12월 12일 오후 6:30분에 30경비단으로 초청하여 연행조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여 이해를 구하기로 했다.
차규헌 수도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유학성 군수차관보, 박준병 20사단장,
최세창 특전사 3공수여단장, 박희도 측전사1공수여단장, 장기오 특전사 5공수여단장 들이었다.


전광석화의 체포 과정

12월 12일 09:30 경, 합수부장 부관 황진아 소령이 대통령 비서실과 협의하에
보고일시를 12월 12일 18:30으로 정했다.
전두환은 이학봉 한 사람만 대동하고 대통령 공관으로 가서 정승화의 혐의점을 보고하고 연행을 재가해주기를 건의했다.
최대통령은 노재현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호출했다.
이는 선례가 없는 일로 전두환은 매우 당황했다.
전두환은 '관례'를 설명했지만 최규하는 끄떡도 하지 않고 노재현을 기다렸다.
전두환은 이를 최대통령의 원칙주의 차원으로 여겼고,
부결의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는 한 치 앞이 안 보였고, 대세가 누구에게 가느냐에 따라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가 좌우되는 긴장과 불확실성의 시기였다.

그는 김재규와 정승화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사후 처신에 대해서는 자신도
떳떳한 입장이 아니었다.
이런 처지라 아마도 혼자서 서명하는 것보다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건의
형식으로 서명하는 게 후환이 없을 것이라는 보신주의 때문이 아니었는가 싶다. 부결하려면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부결의 뜻을 전했지, 구태여 국방장관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곧바로 재가할 것을 예상하고 보고가 끝날 시점으로
예상되는 19:00시를 연행시각으로 약속해 놓았었다.
대통령 재가가 늦어짐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 리 없는 연행팀은 예정된
19:00시에 총장을 연행했다.
19:40분, 허삼수는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에게 연행완료를 알렸고,
허화평은 대통령 비서실을 통해 이학봉에게 알렸고, 이학봉은 전두환에게,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최대통령은 알았다며 게속 노재현 국방장관을 데려오라 했다.
그러나 노재현의 행방이 모연했다.
그래서 밤 9시, 전두환이 노재현을 찾아보기 위해 대통령 공관을 나왔다.


노재현으로 인한 재가 지연

19:20분 경, 총장의 연행 과정에서 총격사태가 벌어졌다.
이웃 장관 공관에 있던 노재현은 이 총소리에 놀라 부인 및 아들과 함께
이웃 단국대학으로 피신했다.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했던 노재현은 20:40경, 국방부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이경률 합참 작전국장을 단국대에 오도록 하여 그의 차량편으로
21:30경에 육분에 도착했다.
국방차관 김용휴가 장관에게 보고를 했다.
“정승화가 합수부에 연행됐고, 이는 대통령에 보고됐다.”

이 말을 들은 노재현은 다시 한미연합사 상황실로 피신했다.
22:10분,  최규하 대통령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즉시 오라고 했다.
그러나 노재현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연합사 상황실에 있었다.
노재현의 소재를 어렵게 알아낸 김용휴 차관이 여러 차례 간청하며 대통령실에 가라고 했다. 12월 13일 01시 30분에야 국방부로 왔다.
김용휴 차관이 대통령 호출에 응하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때에 국방부로 출동한 공수1특전사 병력과
국방부를 경비하던 수경사 병력간에 총격전이 있었다,
총소리를 들은 노재현 장관은 다시 국방부 1층 계단 밑에 숨었다.
노재현의 출두가 지연되자 12월 13일 02시30분에 신현학 총리와
이희성 중앙정보부 서리가 국방부로 와서 직접 노재현의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12월 13일 03:50분, 그는 수색조에 의해 발견되어 장관실로 돌아왔다.
04:00 경, 신현확 총리와 이희성 서리의 권유에 의해 비로소 대통령 공관으로 향했다.
그는 도중에 합수보에 들려 보고를 받은 후, 대통령 재가문서에 서명했다.

12월 13일 04:30분, 노재현은 대통령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후 재가문서에 서명해
줄 것을 건의했고 대통령은 곧바로 거기에 서명을 했다.
배석한 신현확 총리 역시 정승화 연행 재가 문서에 ‘동의’ 서명을 했다.


* 윗글은 12.12.사건수사기록 12권8060-8069 을 토대로 작성된 인터넷 문서를 수정보완한 글임.  
 

12.12사태 바로 알기
질문 포인트

* 10.26사태의 필연이었다.  과연 김재규의 군사반란을 막은 행위가
군사반란으로 해석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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