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5·18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미국인을 인질로 납치하려 한 시민군

    시민군을 괴무장단체라고 불러야 함이 옳다. 광주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한 적도 없었고, 광주사태 당시에는 시민군이란 명칭도 없었다. 광주사태 당시 다수의 광주시민들은 북한의 광주인민봉기 실황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는데 북한방송은 광주의 괴무장단체를 '봉기군'이라고 호칭하였고, 북한 용어 '봉기군'이 5.8측에 유리한 어감으로 순화된 단어가 시민군이었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냐 아니냐는 SBS '그것을 알고 싶다'에서 광주의 괴무장단체 혹은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점거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지금 국민이 광주사태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문을 한마디로 이것이다: "몇 명의 깡패들과 서너 명의 대학생들을 제외하면 주로 미진학 청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시민군이 도청 공무원들의 출근을 금지시킨 채로 공부도 안 하고, 일도 안하고 총 들고 도청에서 십 년 백 년 먹고 자면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SBS 그알은 시민군의 도청 점거의 목적에 대한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도청 점거의 목적이 광주에 거주하는 미국 국민들을 인질로 납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CIA 5.18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황석영 책 너머너머 130쪽 - 미국인 광주 탈출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의 외곽단체를 '국민연합'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총련계 한민통의 한국지부 약칭이었다. 함석헌과 김대중이 이 종북단체 공동의장이었고, 힌츠페터를 광주로 데리로 온 김사복은 함석헌의 동지였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 때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 과정에서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은 김대중과 김사복의 한민통 동지였다. 일본 국민이던 문세광이 광복절 기념식 행사장 및 행사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김사복이 모든 정보를 주고, 범행에 이용할 차량도 한민통 전용 차량인 자신의 승용차를 김사복이 제공하였다. 1980년 5월에는 윤상원이 한민통 한국지부, 즉 국민연합 사무총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인연으로 김사복의 동지가 되었다. 이때 한민통 세력은 1979년의 이란의 회교도 혁명을 벤치마킹하여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란 혁명 모델이란 관공서에 미국인 인질을 납치한 후에 미국 정부를 상대로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주사태 주동세력의 미국인 인질 납치 계획이 사전 누설되어 미 대사관에 알려졌기 때문에 5월 21일 광주의 괴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함락하는 순간 미국이 광주 거주 미국인 200 여명을 군용비행기로 대피시킨 사실을 황석영은 그의 5.18 기록 저서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또한 21일, 광주 시내에 거주하던 미국인 약 200명은 미리 빠져나가서 송정리에 대기하다가 군용 비행기로 서울에 공수되었다. 송정리 비행장에서는 이날 밤 9시부터 자정에 이르기까지 그곳에 착륙해 있던 전투기와 모든 군용기를 군산, 오산 비행장으로 이동시켰다 (황석영 1985, 130).

    2017년의 문재인의 5.18 눈물 쇼 때 문재인이 껴안아준 유족 김소형씨가 5.18 유족이 된 사연이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이런 음모와 깊은 관계가 있다. 미국이 미국인들을 군용비행기를 이용하여 대피시키니까 시민군이 송정리 미군비행장을 점령하려 하였고, 그것을 막으려면 20사단 61연대 제2대대가 먼저 광주국군통합병원을 사수하여야 했다. 김소형씨 부친인 완도시민군 김재평씨는 5월 22일 저녁 그 날의 시민군 활동을 마치고 광주통합병원 바로 옆 쌍촌동 친척집에서 묵으려 했는데, 다른 시민군 조가 계속 통합병원을 향해 총기난사하였을 때 총상을 입었다.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CIA 5.18 문건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CIA 5.18 문건이 있으므로 SBS '그것을 알고 싶다'에서 국민에게 널리 알려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evacuation of americans from kwangju 1980.5.23"이란 제목의 미 국무부 문건에는 5월 21일 국무부가 주한 미대사관에 광주 거주 미국 국민 대피령을 내린데 이어 23일 광주 일원에 거주하는 전 미국 국민들을 당일까지 전원 소개를 완료한 확인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음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2. We understand that you have already ordered all official Americans out of Kwangju and advised Americans elsewhere in the Cholla Provinces to leave. As stated in referenced phone conversation, Embassy should make every effort possible to get all Americans out of Kwangju safely today. Confirm by flash cable or telephone when all official and unofficial Americans are believed to have safely existed the city. We assume that easiest course of action may be for those inside the city to drive quietly to Kwangju Air Base using an American flag if that can be helpful.

    2. 본국 국무부는 귀(貴)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이미 광주의 모든 미국인 공무원들 소개령을 내리고 그 외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에 거주하는 미국인들도 떠나라고 권유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서 통화에서 말하였듯이 대사관은 모든 미국인들이 안전하게 광주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 하여야 합니다. 미국 공무원과 일반 미국 국민이 모두 안전하게 광주를 빠져나온 것으로 판단되는 대로 플래시 케이블이나 전화로 확인해 주십시오. 가장 쉬운 조치는 광주 시내에 있는 미국인들이 미국 성조기를 사용하며 조용히 미공군기지로 차를 타고 오는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evacuation of americans from kwangju 1980.5.23).

    광주사태라는 명칭은 5월 21일 괴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점령한 이후에 생겨났다. 그러면 광주사태는 왜 일어났는가? 5.18 사기꾼들이 왜곡하는 것처럼 공수부대 과잉진압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괴무장단체가 도청을 점거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광주경찰은 계엄군에 경찰이 도청기밀문서들을 안전한 곳으로 수송할 때까지만이라도 사수해 달라고 해서 사수한 것이다. 그러면 도청 점거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SBS는 설명해 줄 수 있는가?

    광주운동권은 꼬뮌주의자들이었다. 유럽에서 제일 먼저 공산주의 혁명이 시도된 사건이 1871년의 빠리꼬뮌(Paris Commune : 파리코뮨)이었다. 이미 1976년부터 광주운동권은 빠리꼬뮌을 벤치마킹하며 무장반란에 의한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 혁명의 꿈을 불태우며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비록 빠리꼬뮌은 실패하였지만 광주꼬뮌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광주운동권의 신념이었다. 그런데 1978~1979년 사이에 발생한 이란의 반미주의자들의 혁명이 광주운동권에 전략적 아이디어를 주었다. 그것은 도청 점거로 광주꼬뮌을 실현한 후 미국인들을 인질로 삼고, 반미친북 사회주의혁명 의도를 숨기고 민주팔이하며 미국 정부를 상대로 직접 협상하면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일거에 전복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미의 정체를 숨기고 잠시 친미 가면을 쓰고 미국과 협상하면 혁명에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의 계획을 윤상원은 1980년 5월 23일 밤의 이재의와의 대화에서 피력하였다.)

    지독한 반미주의자 윤상원이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운동권 이재의에게 그날밤 들려준 전략도 그런 것이었다. 반미세력이 미국 선거철에 여론전으로 반미 투쟁에 승리한 선례가 불과 몇 년 전에 두 번 있었다. 1975년 봄에 월맹군이 시민군으로 위장하여 베트남에서 무장반란을 일으켜 사람들이 죽게 하자 미국에 반전 여론이 확산되어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친미 정권을 포기하였다. 1979년에는 카터 행정부가 이란의 미국인 인질 구출에 실패하자 여론을 의식하여 친미 정권 팔레비 왕정 지지를 철회하였다. 윤상원이 이재의에게 들려준 전략도 광주에서 시민들이 죽을 수록 국제 여론이 미국을 압박하여 최규하 대통령 정부 지지를 철회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무장봉기 지도부가 대안을 제시하며 미국을 상대로 직접 협상하면 미국 정부는 여론에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규하 친미 정부는 일시에 전복되고 윤상원이 주도하는 유혈 혁명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미국 카터 대통령이 이란에서 미국인 인질 구출에 실패하자 선거철에 더 여론이 민주당에 불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란의 친미 정권 지지를 깨끗이 포기한 것을 광주운동권이 벤치마킹한 것이 1980년 5월의 광주사태 발생 배경이었음을 남찬순 기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거대한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던 1980년 5월, 미국의 「지미 카터」행정부는 이란에서의 미인질구출작전의 실패로 인한 깊은 좌절에서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고 있던 중이었다. 4월24일 테헤란에 인질로 잡힌 미국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실시된 90명 정예특공대의 작전은 투입요원 8명의 사망자만 낸 어처구니없는 실패작이었다. 이 실패로 전전긍긍하던 「카터」대통령은 급기야 「사이러스 밴스」국무장관을 해임하고 「에드먼드 머스키」상원의원을 새 국무장관으로 임명, 공화당을 상대로 눈앞에 다가온 대통령선거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남찬순 1985, 303).

    역사는 팔레비가 아니라 호메이니가 독재자였음을 실증한다. 그러나 반미세력이 미국 여론을 이용하여 친미 지도자를 제거할 때 독재자라는 딱지를 붙인다. 호메이니는 잠시 반미 발톱을 감추고 미국과 협상하는척하여 카터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화에 매달리게 해놓고 인질은 석방하지 않은 사실을 이상우 기자는 이렇게 보도한다:

    독재자이긴 했지만 친미적이던 「팔레비」정권이 미국의 외면으로 붕괴된 다음 들어선 「호메이니」의 회교공화국은 강력한 민족주의 열기 속에서 반미감정을 노골화했으며, 일단의 회교학생들은 79년 11월4일,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 그후 1년 3개월여 동안에 걸쳐 미국외교관 등 52명을 인질로 억류했다. 「카터」 대통령은 80년 4월24일 테헤란에 인질로 잡힌 미국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특공작전을 벌였으나, 결과는 특공대원 8명이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상우 1988, 320).
광주에서 봉기했던 항쟁지도부는 이 점을 눈치채고 이란에서의 방식대로 미국인을 인질로 카터 행정부와 밀고 당기면서 군사정권의 퇴진과 계엄군의 철수와 식량수송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지속시킬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당시로서는 대중들의 정치의식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서 결행하지 못했습니다. 광주에 살던 미국인들을 일단 미 공군기지 안으로 대피시킨 미대사관의 조치는 그쪽에서 먼저 이러한 점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는 경우지요 (황석영 1988, 51).

    윤상원은 중남미의 공산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우상으로 받들며 그의 '도시게릴라'를 한국 상황에서 벤치마킹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체 게바라의 전술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구성한 무장단체는 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5월 27일 새벽 도청 구간에서 사망한 시민군 희생자 10명은 모두 시민군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새벽 4시에 이양헌이 도청의 모든 전등을 소등하자 아직 계엄군이 도청 뒷담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시민군들은 아무데나 대고 총을 쏘기 시작하였는데 자기 편을 향해서 쏘았다. 윤상원 자신도 박남선의 M16 유탄발사기 오발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북한군은 5월 21일 도청을 함락하여 광주운동권에 인수인계하고 무등산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27일 새벽의 시민군 전력은 아주 허약하였다.) 윤상원이 아무리 강한 무장단체를 조직하려 해도 현실적으로 그것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하는 것 하나만 해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러면 그가 그런 오합지졸 수십 명을 데리고 60만 대군 국군을 상대로 무모한 싸움을 하려는 바보였는가? 아니다. 그에게는 전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략은 미국과 직접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미국을 대화 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면 도청 점거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한 5.18

    5.18 왜곡세력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수부대 과잉진압이 있었기 때문에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몇 달 전에 도청 점거 계획이 치밀하게 세워져 있었음을 5.18 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은 이미 1990년대에 자신의 자서전에 밝힌 바 있다. 황석영은 윤한봉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그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런 미국인 인질 납치 계획을 알고 있었던바, 그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88년에 『창작과 비평』지에 "항쟁 이후의 문학"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밝힌다:

광주에서 봉기했던 항쟁지도부는 이 점을 눈치채고 이란에서의 방식대로 미국인을 인질로 카터 행정부와 밀고 당기면서 군사정권의 퇴진과 계엄군의 철수와 식량수송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지속시킬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당시로서는 대중들의 정치의식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서 결행하지 못했습니다. 광주에 살던 미국인들을 일단 미 공군기지 안으로 대피시킨 미대사관의 조치는 그쪽에서 먼저 이러한 점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는 경우지요 (황석영 1988, 51).

    임낙평은 윤상원의 전남대 후배로서 5.18 단체에 몸담고 있지만 그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진실은 윤상원이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했던 사실이다. 미국이 광주의 괴무장단체의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 두 척을 보내 주었다는 유언비어를 윤상원이 지어낸 경위를 설명하려면 이건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임낙평은 아주 완곡하게 이렇게 서술한다:

    당시의 시민 대중들은 친미반공 의식에 젖어 있어 반미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 항공모함의 입항을 전두환 군부의 견제로 해석해 대자보나 궐기대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거기에는 미국이 살인 군부의 만행을 저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윤상원 등 일부는 광주 주재 미국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때 그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임낙평 1989, 102).

    윤상원은 혁명가였지만 그의 후배들이 모두 그처럼 과격하였던 것은 아니다. 도청도 점령하여 그 다음 단계인 미국인 인질 납치를 시도하려 하였을 때 그의 후배들의 반대가 의외로 거세어 실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을 제외한 미국 국민을 모두 미국 정부가 소개한 후에도 몇몇 주동자들은 여전히 미국인 인질 납치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 중에 조선대 출신 운동권 김현장이 있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괴무장단체 무기 강제회수 작전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광주사태 당시 김재규 대법원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고, 김대중 세력의 운동권 변호사들이 김재규 변호를 하였기 때문에 법리 전투가 대단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그때 임무는 김재규 재판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아무리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재조사하고, 아무리 SBS와 JTBC에서 모든 자료를 뒤져보아도 전두환이 괴무장단체 무기 강제회수 작전에 관여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혀 그런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38년간 전두환에게 누명을 씌우는 사기꾼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근거는 김현장이 5월 22일 북한방송이 불러주는 대로 베껴 문정현 신부가 전주성당 고속복사기로 수 만장 제작하여 전국에 뿌린 유언비어 삐라뿐이다. (얼마전 SBS가 찾았다는 한 줄 문건도 근거가 있는 문건이 아니라, 김현장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누군가 재인용하여 그런 광주사태 유언비어가 있음을 미국무부에 보고한 문건에 불과하였다.)

    김현장은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없었으며, 전혀 광주사태 현장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저 멀리 전라북도 전주에서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이란 유언비어 삐라를 제작할 수 있었는가? 그 유언비어 원작자는 북한 대남공작기관이었기 때문에 김현장은 자기가 퍼뜨린 유언비어에 대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가 5월 26일 저녁 때 갑자기 전남도청에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지금이라도 외국인 신부들을 인질로 납치하자고 시민군 지도부를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김현장은 김대중의 내란음모의 핵심 주동자였다. 그는 김대중과 형 아우 하는 사이였으며, 서울 동교동의 김대중 집과 광주와 해남 등지를 왔다갔다하면서 광주사태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그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이란의 미국인 인질을 이용한 반미 회교 혁명을 벤치마킹한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5월 26일 초저녁까지는 전남도청에는 무장투쟁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무기 반납을 호소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은 도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윤상원과 박남선 등에게 간절히 무기 반납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회의실에 나타난 김현장이 이제라도 외국인 수녀, 신부, 목사, 신문기자들을 인질로 삼아야 승리할 수 있다고 했던 연설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이제 광주시민들이 살아남을 길은 좌우지간 외국인이라면 수녀, 신부, 목사, 신문기자들까지도 도청에 모셔놓고 인질이 아님을 분명히 해서 함께 지내는 일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광주시민들을 살려주는 셈치고 며칠만 참아달라며 양해를 구해야 한다. 광주사태가 계엄군과의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지어질 때까지는 도청에서 한발자욱도 나가지 못하게 해두면 된다. 전두환이를 비롯한 군인들은 코쟁이들이라고 하면 하느님 모시듯 하기 때문에 그들이 시민들과 함께 있는 한 도청을 향해서 총질은 못하게 될 것이고 협상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대학인의포럼기획단 1994, 152).

    그러나 김창길 등 무기 반납을 호소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인질로 납치하자는 김현장이 간첩으로 보여 자칫 시민군들끼리 총질할지도 모를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김현장이 전두환 관련 유언비어를 열심히 유포한 것도 그 긍극적인 목적은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한 후 봉기지도부가 미국 정부와 김대중의 집권을 조건으로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주동자들에게는 그것이 명전략이었지만 대다수의 광주시민들은 그런 극단적인 반미 행동에 따르기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문재인이 의무적으로 5.18 행사에서 제창하게 한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산 자여 따르라"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윤상원을 따라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라는 것이다. 지난 2018년 봄에 아프리카의 한 해안에서 한국인 선원 3명이 인질로 납치되었을 때 문재인이 문무대왕함을 급파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남의 나라 국민을 인질로 납치해도 되는가? 또 하나 따르라는 것은 도청에 8톤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장치를 한 것을 따르라는 것이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냐 아니냐는 윤상원과 그의 추종자들이 전남도청에 8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장치를 설치한 이유를 SBS '그것을 알고 싶다'가 설명해 줄 수 있느냐의 여부에도 달려 있다. 그러나 SBS는 그 질문에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8톤 다이너마이트는 미국인들을 인질로 삼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이란의 반미 회교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 특공대가 미국인 인질을 구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 윤상원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이유가 있다. 광주 금남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폭발장치를 한 것은 누군가를 인질로 삼기 위함이며, 인질 구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면 윤상원이 전남대 자기 후배들과 광천동 자기 동네 사람들과 들불야학 제자들을 인질로 삼기 위해 다이너마이트 폭발장치를 하였는가? 아니다. 원래 의도된 인질은 미국인들이었다.


    증거인멸꾼 문재인과 택시운전사의 5월

(2018년 5월 27일 작성)

* 위 기사에서 인용된 문헌들의 자세한 문헌정보는 김대령의 저서들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