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5·18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스스로 대통령 되려 한 김대중의 내란음모

    1980년 5월 18일 0시에 김대중이 구속되었다는 것은 가짜 뉴스였다. 김대중은 경찰이나 군인들에게 연행된 적이 없었고, 단지 자작극의 명수이자 오랜 김대중의 심복인 이종찬(훗날 김대중 정부 국정원장)이 자기 아지트로 잠깐 모신 후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유언비어를 대대적으로 뿌렸을 뿐이었다. 김대중이 구속된 시점은 광주사태 이전이 아니라, 광주사태가 끝난지 한참 후 광주사태 배후세럭이 김대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김대중의 내란음모 의혹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의 첫 보고서도 7월 4일 처음 나왔다. 당시 다수의 미국인들이 광주사태 유언비어에 취약하여 5.18 사기꾼들에게 속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본국 국무부에 보낸 7월 6일자 전문에 보면 놀랍게도 광주사태 발생 원인의 정석이라 할 만한 내용이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Allegedly, Kim planned to seize power following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by taking control of the NDP and using various private organizations to overthrow the Present Government and establish himself as Head of an interim government.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후 신민당을 장악하고 여러 사조직들을 현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하고 스스로 과도정부 수반의 됨으로써 권력을 장악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내란음모 관련 미 국무부 문건

    5.18 왜곡세력이 지난 수십 년간 워낙 역사를 왜곡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용어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 the Present Government 는 1980년 7월 당시 현 정부였던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지칭한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1979년 12월에 출범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과도정부(interim government)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아직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지 않아 새 대통령이 선출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79년 11월에 최규하 권한대행의 대선 공약은 과도정부로 하여금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개헌을 하게 하고, 그 새 헌법에 따라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제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관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최규하 권한대행 대선공약

    위의 최규하 대통령 연설문 42쪽에서 보듯, 최규하 권한대행은 1979년 11월 10일자의 특별담화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틈탄 사회혼란이 있을 경우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재침(再侵)을 자초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우리나라가 안정과 발전을 지속할 수 있느냐, 아니면 혼란과 퇴보의 나락에 떨어지느냐의 중대 기로에 처해 있다는 것 등의 시대 상황을 설명한 다음 이른바 ‘제5공화국안’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따라서 본인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시일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을 정부 방침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를 국민 여러분에게 알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헌법문제에 관한 본인의 의견을 개진한다면,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것이 안정을 바라는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면서 헌법질서를 유지하는 가운데 이 나라 민주주의를 착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가장 슬기로운 길이며, 또한 순리라고 믿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다 같이 평화와 안정과 발전을 바라는 충정으로 헌정중단이라는 불행을 방지하고 상호신뢰와 자제화합으로 이 난국을 극복해 나아갑시다.
    국민 여러분의 애국심에 다시 한 번 간곡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비서실 1980, 42).

    최규하 권한대행의 ‘제5공화국안’은 한마디로 헌정중단이라는 불행 없이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자는 것이었다. 바로 이틀 후인 1979년 11월 12일에 조총련계 한민통 한국지부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의장 명의로 최 권한대행의 제5공화국안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성명서 제2항에 한국의 헌정질서를 기어코 중단시케겠다는 의지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유신체제의 연장인 최규하 대행체제는 즉각 사퇴하여야 하며 모든 민주세력을 망라한 거국민주내각을 구성,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 365).

    1970년대부터 김대중이 민주인사로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도록 홍보해 준 국제적 조직이 바로 조총련 산하단체인 한민통이며, 한민통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약칭이다. 그리고 한민통 요원 함석헌과 김대중이 성명서를 발표할 때 사용한 명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별개 단체 명의가 아니라, 한민통 한국지부 명칭이었다. 만년 실업자였던 김대중은 한민통으로부터 공작금을 지원받아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녔으며 수많은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약칭 국민연합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한민통 한국지부라는 점에서 종북단체였다.

    광주사태 발생의 시대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1980년 5월 15일 서울에서 발생한 폭력시위에 대해서는 그 시위 현장에 있었던 학생들이 잘 아는 것이지 결코 광주 단체들이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날 문재인이 인솔한 경희대 시위대가 차량 테러로 경찰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그 날 왜 시위하였는지 문재인에게 물어보라. 그 날 시위현장에 있었던 학생들이 김대중의 내란음모의 산 증인들이다. 그날의 시위구호가 "최규하 하야" "신현확 퇴진"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그 구호는 학생들이 만든 구호가 아니라, 김대중이 만든 구호였는데, 그 구호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암살당하신 후 정국이 지극히 혼란스럽던 때에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가 동시 퇴진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가? 정부가 없어지므로 국가가 전복된다. 김대중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이 석유 외교차 중동 순방 중인 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김대중은 청와대와 각 방송국을 접수하고 선거 없이 스스로 대통령이 된 후 김대중 사회주의 정부 내각을 발표할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위 영상은 한민통 공작원이었던 가짜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손을 거쳐 조총련을 경유하여 북한에 전달되었다. 지금 가장 정적을 많이 숙청하며, 심지어 한 작은 미디어 대표 변희재마저 숙청하는 희대의 독재자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저런 폭력시위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만약 5.18 사기꾼들의 주장대로 1980년 5월에 독재라는 것이 있었다면 저런 폭력시위가, 백주에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경찰을 덥쳐 죽이는 테러가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그 날 저런 폭력시위할 이유가 있었는가? 만약 뭔가 있었다면 그것은 폭력시위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타도하고 선거 없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 하였던 김대중의 내란음모가 있었을 뿐이었다.

    저 위 영상에 보이는 5월 15일의 폭력시위대 중 상당수는 실은 가짜 대학생들이었으며, 이 가짜 대학생들 중에 '전민노련' 수괴 이태복도 있었다. 5월 15일의 폭력시위가 김대중의 내란이었다는 사실은 광주시민군이 아닌 그가 5.18 유공자로 인정받은 사실 및 훗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후 그를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그 시위의 목적이 김대중의 사조직 간부 윤상원과 공동 모의한 국가 전복이었다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 증언한다.

    이태복이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 기자에게 한 증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윤상원의 원래 계획은 5월 18일보다도 사흘 빠른 5월 15일에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 즉 중앙청과 방송국과 청와대를 점거할 계획이었다. 당시 구 청와대는 서울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 근 십만을 헤아리는 시위대가 서울역에 집결해 있었다. 이제 청와대를 경비하는 더 이상의 경찰 저지선은 없었다. 김대중의 무선거 청와대 입성이 코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의 시위의 얼굴마담이 광주 출신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갑자기 심재철이 시위대 해산 광고를 함으로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래서 이 사건을 지금도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른다.

    이태복이 이 증언을 마틴 기자에 하였을 때는 뱅모 박성현이 아직 이태복의 동지였을 때였다. 박성현도 함께 있던 자리에서 이태복의 증언을 메모한 마틴 기자는 7년 후에 “동지들의 눈에 비친 윤상원(Yun Sang Won: The Knowledge in Those Eyes)”이란 제목의 기고문에서 그의 증언의 핵심 줄거리를 기록하였다:

    시위대는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각기 생각이 달랐다. 이태복의 집단은 방송국 등 서울 중심부의 주요 지점들을 점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5월 16일 시위를 취소하고 정부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윤상원씨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서울에서의 패배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고 이태복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이렇듯 이태복과 윤상원의 조직들은 광주사태로 치닫는 주요 사건들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The demonstrators differed on what to do next. Lee Tae Bok's group wanted to occupy key points in the central area such as broadcasting offices. The majority, however,decided to call off the demonstrations on May 16 and wait to see the government’s response. “Mr. Yun, when he heard of this, vehemently criticized the defeat in Seoul,” Lee Tak Bok told me. Lee and Yun’s organization thus was deeply involved in key events leading up to the Kwangju incident itself (Martin 2000, 98).

    그런데 서울에서의 5월 15일의 시위는 최규하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중동 순방을 틈타서 갑자기 준비된 것이었고, 그 이전부터 광주 일원에서 가톨릭농민회가 광주운동권과 더불어 한 주축이 되어 무장반란 준비가 철저하고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전라도의 가톨릭농민회 본부는 광주 가톨릭센터에 있었고, 4월의 가농대회 연사가 김대중이었으며, 김대중이 무장봉기로서의 제2의 동학란이 일어나야 한다고 연설한 뒤 5월 19일을 거사 예정일로 하고 급격하게 무장봉기 준비가 진행되었다. 윤한봉이 5월 19일로 정한 무장봉기 거사일이 윤상원에 의해 하루 빨리 시작된 사태가 5.18 사건이었다.

김일성이 보낸 공작금 받은 김대중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에 미화 20만불의 공작금을 전달하였던 조총련계 북한공작원 김병식은 훗날 북한에서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올랐으며, 1997년 12월 대선에서 드디어 김대중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김대중에게 친서를 보냈던바, 아래는 그 서신의 일부이다.

북한 고위간부가 김대중에게 보년 편지

    조총련 의장 한덕수의 사위였던 김병식은 1971년 김대중에게 공작금을 전달할 당시 재일 조총련 제1부의장이자 국제국장이며 조총련기관지 조선신보 발행인이었으며, 바로 이 조선신보가 한민통과 더불어 광주사태의 한 배후세력이었다. 조총련은 남한에서 거부감이 큰 명칭이므로 한국인에 거부감을 덜 주는 명칭이 '한민통'이었고, 한국에서의 합법적 활동이 가능케 하기 위한 조직이 바로 함석헌과 김대중을 공동의장으로 하는 한민통 한국지부였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김대중이 민중봉기 일으켜 스스로 대통령 되려고 시도한 사건이 세 번 있었는데, 그 첫번째가 1979년 11월 24일의 '명동YWCA위장결혼식 사건'이요 이때도 민란 음모 주동세력의 최고위층 지도자가 함석헌이었다. 즉 한민통 한국지부 공동의장이 이미 그때부터 김대중 세력의 내란음모 최고지도자였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주동자 함석헌 김대중 세력 가운데서 함석헌은 김대중보다 서열이 높았다. 그런데 이미 오래 전부터 위장 택시운전사 김사복이 함석헌과 동급이거나 맞먹는 위치에 있었다. 1975년 10월 3일 포천 약사봉에서 찍은 아래 사진을 보라. 만약 김대중이 함석헌 옆에서 이런 건방진 자세를 취했으면 야단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독 김사복한테는 이토록 고분고분했다는 것은 김사복이 한민통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바로 전해인 1974년 8월 15일에 김대중의 한민통 청년동지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암살하였을 때 범행에 김사복의 승용차가 이용되었다. 김사복이 문세광의 공범이었다는 사실은 김대중 추종자들로부터 영웅 대우를 받을 만한 일인데도 김사복이 어째서 발설하지 않았는가? 김사복의 역할은 한민통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는 공작이었기 때문이다. 함석헌과 김사복

     1979년 11월24일 오후 5시30분 명동 YWCA 강당에서 가짜 신랑 홍성엽이 입장하자, 여러 곳에서 유인물이 빠르게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다. 이때 뿌려진 유인물 제목이 “통대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였으며, 이 유인물은 부마사태를 ‘부산ㆍ마산 시민봉기’라고 호칭한다. 이 유인물은 “유신잔당 물러가라”는 구호로 끝을 맺는데, 여기서 “유신잔당 물러가라”는 말뜻은 “최규하 권한대행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그 구호가 1980년 4월 말에는 한층 더 공격적, 호전적이 되어 “유신잔당 타도에 우리의 모든 力量을 총집결하자!"는 구호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5월 초중순의 시위구호는 “최규하 물러가라”로 시작되었으며, “신현확 물러가라”는 구호가 추가되었었던 것이다.

    이날 뿌려진 또 하나의 유인물 제목은 ‘거국 민주 내각 구성을 위한 성명서’였다. 이 유인물에서는 부마사태를 “부산, 마산 전역을 휩쓴 거대한 민중봉기”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유인물 첫 문장은 “……투쟁은 마침내 부산, 마산 전역을 휩쓴 거대한 민중봉기로 분출되었다. 그 결과 독재자는 처단되었고”라는 표현으로 10·26대통령 시해사건을 서술함으로 시작한다. 이 유인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총궐기하여 통대선거를 분쇄하고……”라는 선동으로 끝을 맺는다.위장결혼식 때 뿌려진 두 제목의 유인물 명의는 모두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 대회장 함석헌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대회장 함석헌의 손발이 김사복이었다. 김사복의 승용차가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에 이용된 것, 그리고 김사복이 바로 그 승용차에 힌츠페터를 태워 광주로 데리고 간 것 등은 김사복의 한민통 공작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였다.

    선거 없이 김대중을 정부 수반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지는 취지로 함석헌 명의로 1979년 10월 24일에 발표된 ‘거국 민주 내각 구성을 위한 성명서’에는 8년 전 1971년에 조총련이 김대중에게 미화 20만 달러를 공작금으로 주면서 한 말의 요점과 비슷한 표현도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관한 외세의 간섭을 일체 거절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어떤 방법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우리보다 잘 아는 외국 및 외국인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자주 국민의 긍지로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민주화를 추진해 나갈 결의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일체의 외세는 유신잔당을 지지하거나 유신독재 연장 음모에 조력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발언과 행동을 삼가야 할 것이다 ('역사로서의 5.18' 제4권, p350).

    같은 날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 현장에서 배포된 또 하나의 성명서 ‘통대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에 ‘유신잔당의 선봉인 최규하’라는 문구가 있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 379). 한민통 한국지부와 '민청협' 등 그 날 민중봉기로 최규하 권한대행 행정부를 타도하고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세우려 했던 바로 그 세력이 다시 뭉쳐 최규하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 1980년 5월 15일 서울에서의 가두 폭력시위였으며, 이 폭력시위가 김대중이 스스로 과도정부 대통령이 되려 하였던 두번째 시도였다.

    한민통은 언제나 '민주화'를 '북한식 인민민주화'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지만 이 용어는 한국 국민을 속이고 민란을 선동하는데 써먹기에 아주 용이한 용어였다. 5월 15일에는 서울 시내 각 방송국들을 접수한 김대중 사회주의정부 수립을 발표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함석헌 명의로 6개월 전부터 발표된 김대중 일당의 성명서들에 언론과 방송 장악 음모가 서려 있었다. 5월 15일의 대규가 가두 폭력시위 바로 한 주 전인 5월 7일자 성명서 ‘민주화 촉진 국민선언’에는 이런 내용의 단락이 있다:

    왜곡보도와 반민주적 논설로써 민중들의 민주화 열망을 배반하고 유신잔당의 독재연장 음모에 협력하고 있는 일부 언론, 방송, 기업들은 역사와 민중의 준엄한 심판을 각오하여야 하며, 만약 그것을 면하려면 지금 이 순간부터 태도를 확실하게 전향하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로서의 5.18' 제4권, p363).
함석헌과 김대중의 내란 선동 선언문

▲ 한민통 한국지부 명의로 발표된 1980년 5월 7일자의 성명서. 당시 김대중은 정당도 소속 정당도 없었으나 함석헌의 한민통 한국지부 조직, 문익환 목사의 민중신학 계열 목회자들, 그리고 함세웅 신부를 위시한 정의구현사제단의 협조로 이 성명서를 발표할 수 있었다. 윤보선씨는 김대중 일당의 강요에 의해 원치 않는 서명을 하였고, 그 외 내란음모 주동자들 중에서 함석헌의 이름이 가장 위에 있다.

    분명 김사복은 힌츠페터를 데리고 광주로 가기 전에 김대중의 내란음모의 핵심 주동자들 한 명이었다. 이런 사실은 위의 김대중의 5월 7일자의 내란 선언서 서명자들 중에 함석헌과 계훈제 등 한민통 관계자들, 즉 이미 그보다 5년 전에 일본의 힌츠페터 일행과 더불어 포천 약사봉에 함께 가서 식사하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에서 힌츠페터 왼편에 계훈제가 오른편에 김사복이 있다. 이들 중 여러 명은 김사복의 승용차가 육영수 여사 암살에 이용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즈음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김대중의 성명서 작성 담당 비서였으나, 한번도 그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던 것처럼 한민통 조직의 보호를 위해 김사복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함석헌과 힌츠페터와 김사복과 계훈제

    다시 위의 5월 7일자 성명서에서 제7항은 김대중이 퍼뜨린 이원집정부제 유언비어이다. 이 유언비어는 최규하 대통령이 신현확 총리를 차기 대통령 후보, 즉 곧 치루어질 제5공화국 대통령 후보로 내정하였으며, 최 대통령의 충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신현확 총리 출마를 지지한다는 소문이었다. 5.18 사기꾼들이 15년 후 5.18 재판 때는 말바꾸기를 하였지만 광주사태 당시에는 12.12 사태가 쿠데라라고 말하지 않고,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 충신이라고 주장했었다. 개헌 공청회는 최규하 대통령이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기 위한 공청회였으며, 김대중 세력은 그것을 방해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하였다. 그래서 5월 15일의 가두 폭력시위 구호가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이 성명서의 끝 문장은 폭력시위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내란 선언문이다:

    각 정당. 사회단체는 더 이상 안이한 환상에 사로잡혀 현 시국을 수수방관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위한 전 국민적 투쟁에 결연히 합류하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각계각층의 민주 애국시민들과 함께 모든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는 민주화운동을 과감히 전개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김대중 일당은 민란을 일으키겠다고 이렇게 협박적으로 선포한 후 5월 15일에 대규모 가두 폭력시위로 실력행사를 한 후 16일에 다시 성명서를 발표하며 신현확 총리 내각이 19일 월요일까지 사흘 내에 총사퇴하지 않으면 민란을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강제로 전복시키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때가 최 대통령의 석유외교차 중동순방 중이었기 때문에 신 총리는 5.17심야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경향신문에 실렸었던 아래 문건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체계도"는 맨위 문건, 즉 김대중이 사조직을 동원하여 최규하 과도정부를 전복시키고 스스로 과도정부 대통령이 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글라이스턴 주한미국대사의 보고 내용을 확실하게 입증해 주는 문건이다. 한민통이 지원해 주는 공작금으로 김대중은 3월과 4월 사이에 무려 20 여개의 단체들을 만들었으며, 거사가 성공하면 전리품을 나누어 갖는다는 약속을 받은 이 단체들이 광주사태 등 당시 폭력시위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김대중의 내란음모 조직도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CIA 5.18 문건 : 미국인을 인질로 납치하려 한 시민군

(2018년 6월 1일 작성)

* 위 기사에서 인용된 문헌들의 자세한 문헌정보는 김대령의 저서들에 있습니다.